효종은 송시열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함으로써 북벌론에 동참 권유했으나 송시열은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끌어오다가 효종 의문사함. 그 후 현종 즉위 이래 효종의 1년상이냐, 3년상이냐로 첨예하게 대립(예송 논쟁 1차), 15년 후 효종비의 죽음계기로 2차 예송 논쟁 - 남인과 서인의 주도권 싸움
남인 - 윤선도, 윤휴, 허목(반주자학파)
서인 - 송시열, 송준길, 유계, 윤선거(주자예론파)
∴ 인조반정 이래 유지되던 서인과 남인의 공존적 측면이 예송논쟁 통해 붕괴
윤휴 : 학문이나 사상의 절대성 인정하지 않는 유연한 인물. 독창적 사상가
송시열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주자학설 비판하여 사문난적이란 소리 듣게 됨
위기극복위해 현 체제 개혁해야 한다는 개혁사상
송시열 : 양란 이후 지배체제 더욱 강화코자 한 수구사상
이 사상 간의 충돌이 사문난적 논쟁임이 논쟁으로 인해 서인도 양분됨
․ 남인
․ 서인 - 소론 : 박세당(이경석 극찬, 송시열 비난)
노론 : 송시열 따르는 자들
․ 현종은 서인의 위세를 감하고 정권교체를 위해 남인 허적 영의정에 앉힘
그 후 수일 후 34세로 의문(?)의 서거
․ 숙종 - 남인 등용(허목. 윤휴)
※ 주희가 주자학을 만든 것은 남송에서 수전농업의 발달로 성장한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즉 주자학의 성립에는 사대부 계급의 성장과 이익 추구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송시열이 활동할 무렵 주자학은 조선에서 이미 그 순기능을 다한 학문이었다.
주자학은 절대적 위치에서 상대적 위치로 내려와야 했다. 사대부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주자학으로는 더 이상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가 없었다. 이제는 농민의 자리, 백성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해야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하는 역사의 반동으로 나아갔다.
조선 초 ․ 중기 사회 변혁의 사상이었던 조선 성리학은 인조 반정 후 수구사상인 예학으로 나갔다. 예학은 한마디로 각 신분에 따르는 분수와 예절을 지키라는 주장이다.
율곡사상의 진수인 껍데기 학맥만을 이은 개혁이 아닌 수구사상이었다.
(김장생, 김집, 송시열 등)
송시열은 “다행히 주자 뒤에 나서 학문이 어긋남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 주자학이 정치에 적용될 때 어긋남이 너무 컸던 것이 송시열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주희의 의리론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것, 즉 소중화 사상을 주자학의 조선화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소중화란 명분론이 아니라 사회발전에 맞게 학문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유학의 진정한 조선화는 소중화가 아니라 양반 사대부 중심의 중세 유학을 농민을 포함하는 일반 양인 중심의 근세 유학으로 바꾸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 사고 속에서 신분제 철폐를 주장해야 했다. 왕가와 사대부가의 예가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를 주장해야 했다.
노론의 재집권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宋子 라는 성현의 일컬음을 받았지만, 송자란 찬사는 공허하게 들린다. 송자라는 영예 또한 그의 당인 노론에서 바친 찬사에 불과했다. 사회변화를 실현시키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면 송시열은 진정한 성인으로 많은 백성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다.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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