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양식

희망의 혁명 ( 에리히 프롬 )

엔젤트럼펫 2006. 12. 12. 15:36
 

유령이 우리들 사이에 얼굴을 쳐들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뚜렷하게 보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것은 지난날의 공산주의나 파시즘의 망령이 아니다.

새로운 망령인 것이다. 즉 그것은 완전히 기계화되고, 최대한의 물자의 생산과 소비에 열을 올리고 컴퓨터로부터 지시를 받는 사회이다. 이 사회과정의 안에서는 인간자신이 기계 전체의 한 부분이 되고, 충분한 음식물과 오락이 주어지면서도 수동적이 되며, 생명감을 상실하고 감정도 고갈해 간다. 이 새로운 사회의 승리와 더불어 개인주의와 프라이버시는 소멸하고 말 것이다.


즈비그니예브 브레진스키가 말하였듯이 <전자기술사회>에 있어서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퍼서낼리티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감정을 조종하고 이성을 지배하게 되며, 몇 백만이라는 조직되지 않고 있는 시민의 개인적인 지지를 쉽게 집중시키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아마 현재에 있어서 가장 을시년스러운 징조는 우리들이 자기 자신의 시스템에 대하여 지배력을 상실하였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점일 것이다.


우리들은 핵무기에 의하여 전멸의 위기를 위협받고 있는 동시에, 책임 있는 결정으로부터 제외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수동성에 의한 정신적인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다.


과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하여 사용하게 되는 지식을 찾아냈다. 인간은 예상도 못하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기술과 물질적 소비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탓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생명과의 접촉을 상실하였다.

종교적 신앙과 그에 결부된 휴머니즘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은 기술적, 물질적 가치에 몰두하고, 깊은 정서적 체험과 그에 수반되는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인간이 만든 기계는 너무나도 강력한 대상이 되어서, 스스로의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그것이 바야흐로 인간자신의 사고를 결정하고 있다.

현재 우리들 체제의 가장 무서운 징조의 한 가지는 우리나라의 경제가 무기의 생산 및 모든 방위시설의 유지와 최대한의 소비원리에 의존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들의 경제체제가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한 조건은 물리적 파멸로 인하여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는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 개인을 전혀 수동적인 소비자로 바꾸어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과 또한 개인에게 무력감을 품게 하는 관료제를 낳고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희망이 극단으로 가면 체념의 위장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카프카의 소설 속의 늙은 사나이와 흡사하다.

그들은 희망을 가지면서도 마음의 충동에 의하여 행동하는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관리가 푸른 신호, 곧 안전신호를 보이지 않는 한, 그들은 언제까지나 기다리게 된다.

 이러한 수동적인 희망과 밀접하게 관계를 갖는 것은 <때(時點)>를 기대한다는 식으로 표현되는 일반화된 희망의 형태다.


구차스러운 일에 자기는 매우 활동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대개 자기가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극단으로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스스로는 크게 활동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직시하였을 때에 생기는 불안에서 피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관념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탐욕을 극복한 사람은 여하한 우상이나, 여하한 물건에도 집착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아무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풍부한 것이다. 스스로의 욕망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강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안과 밖에 있는 현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상이나 비합리적인 욕망이나 환상 따위를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완전히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상태를 향하여 나아가려는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을 모르는 태도에의 새로운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며 그때마다, 어김없는 힘과 기쁨의 감각에 눈뜨는 것을 지각하게 된다.


* 리바이어던[괴물] - 현대산업사회가 만들어 낸 <기계>를 비유하여 말함

  홉스는 그의 <국가론>에서 국가를 가리켜 리바이어던[괴물] 이라고 했다. 

  이는 요단강에 나오는 괴물을 비유해서 국가의 모순, 상극성을 표현한 것이다.


광고하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탐내고 있는가를 아는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공격수단이다.


이 사회는 많은 무익한 물건을 만들어 내어서 그것과 같은 정도로 많은 무익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인간의 생산기계의 톱니바퀴로서 한 개의 물질이 되어 인간일 것을 그만둔다. 그는 흥미를 갖지 않는 일을 하거나, 흥미도 갖지 않는 사람과 사귀거나, 흥미도 갖지 않는 물건을 만들거나 시간을 보낸다.

「......유용한 물건의 너무나 많은 생산은, 너무나 많은 무용한 인간을 만들어 낸다.」

「기계가 인간의 약점에 응용되는 것은 약한 인간을 기계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논리적인 사고는 그것이 단순히 논리적인 것에 머문다면, 합리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삶에의 관심에 의하여 유도될 것, 모든 구체적인 사실, 모든 모순을 끌어안고 있는 전체적인 생활을 꾸려가는 탐구에 의하여 유도되는 것이 필요하다.

정서적 생활에 있어서 합리성이란 인간의 심적 구조가 조화가 잡힌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그 밸런스를 성장시키는 것을 지지하고, 촉진하는 그와 같은 정서를 의미한다.


생명이 없는 것에 미혹당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구조보다는 <법과질서>를 좋아하고, 자발적인 방법보다도 관료적인 방법을, 생물보다도 소도구 따위를, 독창보다도 모방적 반복을 풍요함보다도 수습된 것을, 쓰는 것보다도 저축하는 것을 저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최초의 시기에는 과학이 확신에 새로운 기초를 줄 수가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前世紀까지의 합리적인 인간에 있어서는 그리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더욱 더 복잡하게 되고, 인간의 모든 균형이 상실되어감과 더불어, 또한 개인의 무력감과 고독감이 강해짐과 아울러, 과학에 뜻을 두는 인간은 합리적인 독립된 인간이 안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를 상실하고, 인생에의 완전한 지적․정서적 참가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는 용기를 상실하였다.


호트라인은 체제의 지도자들이 때를 놓치기 직전에 제 정신, 곧 正氣를 차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위험한 대결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대화의 편이 컴퓨터가 명령하는 수단보다도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 호트라인 :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의 수뇌부 통신망


우리들의 시대는 신을 대신하는 것을 찾아내었다. 즉 비인간적인 계산이다. 이 새로운 신은 이제야 우상이 되었으며, 모든 인간이 그 희생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種으로서의 특징에 가장 의미 깊은 정의를 내린 사람은 칼 마르크스일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자유로운 의식적인 활동>이라고 정의하였다.


인간의 결정은 본능이 대신해서 해주지는 않는다. 인간 그 자신이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항상 갈림길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가 행하는 모든 결정에는 실패의 위험성이 뒤따른다. 인간이 의식을 얻기 위해서 지불하는 대가는 불안이다. 인간은 인식력을 가지고 인간의 조건을 수용함으로써 성공의 보증은 없다고 하더라도 실패는 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에 의하여 불안을 견딜 수가 있다. 인간에게는 확실한 것은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단 확실한 예언은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허튼 기분으로 태어나서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자연을 초월하고 있다. 인간은 행동과 결정의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본능의 원리와 교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어떤 방향설정의 규범을 가짐으로써 시종일관한 세계상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죽음과 굶주림과 상처 따위의 위험이 아니고, 또 한가지의 인간독특의 위험, 즉 광기의 위험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안심감에의 소망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의존상태를 사랑한다. 비교적 안락해진 물질생활에 의하여 또 세뇌를 교육이라고 부르며, 복종을 <자유>라고 부르는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의존이 용이하게 되는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인간은 현실과 충분히 접촉하면 할수록 강해진다. 인간이 단순한 羊인 한에는, 그리고 그의 현실이 본질적으로는 사회가 조작해서 만들어 낸 허구, 사회가 사람과 물건을 보다 적절하게 조정하기 위해서 조작해 낸 허구에 불과한 이상에는 인간으로서는 약한 존재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가치체제의 사이를 헤매고, 그 결과 어느 방향으로도 충분히 발달할 수가 없다. 그들은 커다란 미덕도, 커다란 악덕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입센의《페르귄트》라는 작품에서 훌륭하게 표현하였듯이, 각인이 닳아 버린 화폐와 같은 것이다. 자기도 소유하지 않고, 동일성도 가지지 않고, 더구나 그 사실을 찾아낼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 《페르귄트》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 입센 (1828-1906)의 작품이다. 《인형의 노라》등 일련의 사회극, 여성해방 등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이 작품은 인간의 영혼의 발전이 인생도정과 더불어 변모하는 것의 묘사를 전체적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