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심은 대개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며, 이런 경우에는 자존심을 키우는 것이 그 치료법이다.
인간은 누구나 전지전능하지 못하므로, 전적으로 권력욕에 좌우되는 삶은 조만간에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성공한 후에 어떻게 그 성공을 처리하면 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면, 성공은 반드시 성공한 자를 권태의 먹이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튿날 아침은 결국 전날 저녁이 즐거웠던 만큼 권태롭다.
생명이라는 자본을 금전적인 자본처럼 소비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
인류의 죄악의 반은 권태를 두려워한 나머지 저질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건설적인 권태는 마약이 없는 데서 생기고 파괴적인 권태는 생동하는 활동이 없는 데서 생긴다.
조용한 생활이 위인들의 특색이었다는 것, 게다가 그들의 쾌락은 외부에서 볼 때 결코 자극적이지 않은 쾌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즐거움은 주로 약간의 노력과 창의력에 의해서 어린이 스스로가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찾아내는 것이라야 한다.
행복한 삶은 대부분 조용한 생활이어야 한다. 참된 환희는 오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문제들은 그 문제들을 다루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도외시할 수 있다.
일단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지 않는 한 결정을 제고하지 말라. 우유부단보다 더 피곤한 것은 없고 또 그것만큼 무익한 것도 없다.
우리들이 하는 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며, 우리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 또한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커다란 슬픔이라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다. 마치 인생의 행복을 끝장나게 할 것처럼 보이던 심각한 고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로 사그라져 언젠가는 그 고민의 매운 맛을 거의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자기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면 인간의 자아라는 게 세상에서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이를 다루는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엄격하며 변함없는 분배의 정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비교하는 습관은 치명적인 것이다. 즐거운 일이 생겼을 때에는 그 일을 충분히 즐겨야지, 다른 사람에게 생겼을지도 모를 일에 비하면 즐거운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며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겸손한 사람들은 더 많은 자신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잘 차려입은 여자를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여자는 사실 본능적 생활에 있어서 불행하다고 확신해도 좋다.
전통적으로 도덕적이라고 일컬어진 사람의 성격에는 얼마나 많은 미신이 섞여 있는가를 생각해보고, 온갖 종류의 상상적인 도덕적 위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금지로써 막아내면서도 어른이 처해 있는 실제의 도덕적 위험은 사실상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반성해보라.
너그럽고 관대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태도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되므로 스스로에게도 행복의 원인이 된다.
관대한 태도는 안정과 자기 신뢰의 결과이며, 이른바 정신적 조화를 요구한다.
인간은 자신이 합리적으로 믿는 바에 대해서는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에 반대되는 불합리한 신념이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짧은 동안이나마 자신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가장 강렬한 환희를 경험할 때는 정신이 가장 활동적이어서 사소한 일은 모두 잊어버리는 순간이다. 사실상 이것은 행복의 최고 표준 중 하나이다.
젊은 사람들이 어떤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의 압력에 굴복한다면 이는 부당한 것이다.
우리는 餓死나 투옥을 피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한도 내에서만 여론을 존중하면 된다. 이 한도를 넘는 것은 불필요한 횡포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것이고, 결국 온갖 방면에서 행복에 대한 간섭을 받기 쉽다.
감정의 복합성은 강물의 물거품과 같다. 물거품은 잔잔한 물의 흐름을 교란시키는 장애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주류가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수면에는 물결이 일지 않으며, 주류의 힘은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취미에 몰두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신념에 헌신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수록 행복의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고 또한 그만큼 운명의 지배를 덜 받게 된다.
모든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인생은 너무도 짧으나, 매일매일의 생활을 채우는데 충분할 만큼 많은 사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내성적인 사람이 걸리는 병에 걸리기 쉽다. 내성적인 사람은 눈앞에 세상의 천태만상이 펼쳐져 있건만 이를 외면하고 오로지 자기 마음속의 공허만을 응시할 뿐이다.
겁 많은 학생은 그의 서재의 네 벽에 둘러싸여 있어야 안심한다. 만일 그가 우주도 서재와 마찬가지로 질서 정연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그는 용감히 거리에 나서야 할 때에 거의 서재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혼자서도 충분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여준다면 당신은 그 아이의 수고를 덜어주는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권력애를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어린아이에게 너무 생생하게 위험을 알려준다면 당신은 그 아이가 언제까지나 당신에게 의존하기를 바라는 욕망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리라.
현명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핵심적인 관심 이외의 많은 부차적인 관심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중용은 흥미 없는 이론일지는 모르나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서 참된 이론인 것이다.
행복은 신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취하는 것이며, 이러한 성취에 있어서 노력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거대한 역할을 맡지 않으면 안 된다.
비극이나 불행을 직시하며 도피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면 당신은 반드시 행복을 정복할 수 있다는 늠름한 생활 철학을 가르치려는 것이 그의 행복론인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보다는 광활한 바깥 세계야말로 우리의 행복의 무진장한 보고라는 생활태도, 어떠한 불행도 이겨낼 수 있는 의지와 용기, 밝고 명랑한 인생관만 있다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고 이러한 것은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유적 충동에 따라 사는 것이 최악의 생활이고 창조적 충동에 의해 사는 것이 최선의 생활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며 자유롭게 우주가 주는 장관, 우주가 주는 환희를 즐기고 또한 자기를 뒤이어 오는 사람들과 실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에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때, 우리는 가장 큰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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