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양식

사회계약론 (루소)

엔젤트럼펫 2006. 12. 11. 11:42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루소의 가장 큰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루소는 전체의 이익을 확보해 주는 것을 그가 의미하는 법률이라고 보고, 법률이 인정하는 바와 이익이 규정하는 바를 항상 결합시키려고 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곳에서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사회질서는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가 되는 신성한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권리는 자연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질서는 약속에 근거를 둔 것이다.


모든 사회 중에서 가장 오래 되고 유일하게 자연적인 것은 가족이라는 사회이다. 게다가 가족에서조차 자식들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동안만 아버지와 결합되어 있다. 이 필요성이 없어지면 자연적 유대는 곧 끊어지고 만다.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양육의 의무에서 벗어나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독립하게 된다. 만약 이들이 계속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결합은 더 이상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의지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가족이라는 사회도 결국은 약속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가는 법칙은 자기보존에 유의하는 것이고, 그 제일의 배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이성을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자기 자신만이 자기보존에 적합한 수단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가족은 말하자면, 정치사회의 최초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배자는 아버지에 해당되고 인민은 자식들에 해당된다. 또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를 양도하고 있는 것도 오직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가족과 국가의 차이는, 가족에 있어서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이지만, 국가에 있어서는 지배자가 인민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의 희열 때문에 인민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그로티우스에 의하면, 전인류가 백 명 정도의 인간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백 명 정도의 인간이 전인류에게 예속되어 있는지가 의심스럽게 된다. 그의 저작을 통해서 본다면 첫 번째 견해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또한 홉즈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인류는 많은 가축의 무리로 나누어지고 각 무리마다 주인이 있으며 그 주인은 자기 무리를 잡아먹기 위해 지켜 주고 있다는 것이 된다.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난 인간이 노예가 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만큼 확실한 말은 없다. 노예들은 그들의 구속안에서 모든 것, 심지어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욕망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만약 태어날 때부터의 노예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 이미 본성에 반하여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력이 최초의 노예들을 만들어 내었고, 노예들의 비겁성이 그들의 노예 상태를 영원히 유지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폭력이란 한낱 물리적인 힘이다. 이 물리적인 힘이 어떻게 하여 도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폭력에 굴복하는 것은 불가피한 행위이지, 자의에 의한 행위는 아니다.


그 누구도 나면서부터 자기의 동료를 지배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또 힘으로부터는 어떠한 권리도 생기지 않는 것이므로,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인정되는 모든 정당한 권위의 기초는 오직 약속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인간은, 자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기의 생활 수단을 얻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파는 것이다.


전제군주는 그 신민에게 사회적 안녕을 보장해 준다고 하는 자도 있다.


안녕은 감옥 속에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감옥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몸을 아무 대가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행위는, 그것을 하는 사람의 정신이 나갔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정당하지 못하고 무익한 행위인 것이다.


인간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이며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의무마저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포기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부터 자유를 완전히 빼앗는다는 것은 그의 행위로부터 도덕성을 완전히 빼앗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서로 적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서이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가 아니다.


각 국가는 다른 국가를 적으로 가질 수 있을 뿐이지 인간들을 적으로 가질 수는 없다.


전쟁이 계속되는 속에서도 공정한 군주는 적국의 국가 재산은 모두 몰수해 버리지만 개인의 생명과 재산은 존중한다.


전쟁의 목적은 파괴에 있기 때문에, 방위자가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한 그들을 죽일 권리가 있으나, 그들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즉시 그들은 적이나 적의 도구가 아니라 단순한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므로, 그 누구에게도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승자가 패자를 죽이는 대신 생명의 대가로 자유를 빼앗는 것은 패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패자를 무익하게 죽이는 대신 유익하게 죽이는 것뿐이다.


‘노예’라는 말과 ‘권리’라는 말은 서로 모순될 뿐, 양립할 수는 없다.

흩어져 있던 많은 개인들이 한 사람씩 어떤 인간에게 예속될 때,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과 노예의 주종관계이지 지도자와 인민의 관계는 아니다. 그것은 막연히 모인 집합체라고 할 수는 있으나, 결합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미리 정해진 약속이 없다면, 선거가 만장일치로 되지 않는 한, 소수자가 다수자의 선택을 따라야 할 의무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주인을 원하는 백 사람이 주인을 원치 않는 열 사람을 대신하여 투표할 권리는 어떻게 하여 생겨나는가? 다수결의 원칙도 원래 약속에 의하여 성립된 것으로, 최소한 한 번만은 만장일치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은 새로운 힘을 더 만들어 낼 수는 없고 다만 이미 있는 힘을 결합하여 방향을 새로 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단결에 의하여 힘의 총화를 이룩함으로써 장애물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구성원 전체의 공동의 힘으로 각자의 신체와 재산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각 개인은 전체에 결합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밖에 복종하지 않고, 이전과 같이 자유로울 수 있는 하나의 결합 형태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계약이 해결해 주는 근본문제인 것이다.


첫째로 각자가 자기를 전적으로 양도해 버리고 나면 조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되고, 또 조건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되면 그 누구도 타인에게 조건을 무겁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는 자기의 신체와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하여 일반의지의 최고 지도하에 맡기고,(그런 정치조직 속에서)우리 모두는 각 구성원을 전체 가운데 불가분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이 결합행위가 성립하는 즉시 계약자인 개인들 대신에 하나의 정신적이고도 집합적인 단체가 형성된다.


의무와 이익이 동등하면, 계약당사자들이 서로 돕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주권자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로 형성된 것이므로, 개인들의 이익에 반대되는 이익을 갖지 않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


국가를 구성하는 정신적 인격이 현실적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허구적인 존재로 보아, 각 개인이 신민으로서의 의무는 수행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만을 행사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정이 계속되면, 결국 정치체의 멸망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계약을 공허한 규정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계약은,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여하한 자를 막론하고 복종하도록 단체 전체에 의하여 강제된다는 약속을 암암리에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상태로부터 사회 상태로의 이행은 인간에게 극히 현저한 변화를 가져다 준다.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본능 대신에 정의를 기본으로 삼게 하고, 이제까지 결여되어 있던 도덕성을 부여해 준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육체의 충동 대신에 의무의 소리가 들리고, 욕망 대신에 권리가 나타나게 된다. 이제까지 자기 자신의 일만을 생각했던 사람도 이제는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기 전에 자기의 이성과 의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회 상태에서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많은 이익을 잃게 되지만, 그 대신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그의 능력은 크게 훈련되고 개발되며 그의 사상은 폭이 넓어지고 그의 감정은 고상해질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은 전체적으로 고양되기 때문에 만일 이러한 새로운 상태를 악용하여 인간이 벗어난 자연 상태로 다시 떨어지는 일만 없다면, 인간은 자기를 자연 상태로부터 지성적인 존재, 즉 인간이 되게 한 저 행복한 순간을 항상 축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힘 이외에는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자연적 자유와, 일반의지에 의하여 제한을 받고있는 사회적 자유를 분명히 구별해야만 한다.

가장 먼저 차지한 자의 권리에 불과한 점유와 명확한 권리에 기초를 두고 성립되는 소유권을 분명히 구별해야만 한다.

이와같은 것 이외에, 우리는 인간이 사회 상태에서 얻는 것으로 도덕적 자유를 들 수 있다. 도덕적 자유만이 인간을 진실로 자기의 주인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욕망의 충동에 따르는 것은 노예적인 굴종이지만, 자기가 스스로 만든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어떤 물건의 소유자로 만드는 적극적 행위는 그 인간을 그 밖의 다른 물건의 소유자가 되지는 못하게 한다. 자기의 몫이 정해지면 인간은 그것에만 만족해야 하며, 공동체의 재산에 대해서 그 이상의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선점권에 있어서 우리가 타인의 물건을 존중하는 것은, 그것이 타인의 것이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이다.

선점권이 정당한 권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첫째 그 토지에 아무도 살지 않을 것, 둘째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면적만을 점유할 것, 그리고 셋째 공허한 형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과 경작에 의해서 점유할 것 등이다.


기본적 계약은 자연적 평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연에 의하여 인간들 사이에 주어진 육체적 불평등 대신에 도덕적이고 법률적인 평등을 가져온다는 점과, 인간은 체력이나 재능에 있어서는 불평등할 수도 있지만 계약과 권리에 모두 평등하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나쁜 정부는, 가난한 자는 계속 비참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고 부자는 항상 약탈하는 지위에 있도록 유지시키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실상 법률이란 항상 유산자에게는 유익하고 무산자에게는 불리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상태는,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일정한 재산을 소유하고 그 누구도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지 않을 때에만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반의지만이 공공의 복지라는 국가 설립의 목적에 따라 국가의 모든 힘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들의 이해관계의 대립 때문에 사회 건설이 필요한 것이라면, 이들 이해관계의 일치가 사회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서로 대립되는 이해관계 속에 들어 있는 공통적인 요소가 사회적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공통점이 없다고 한다면, 어떠한 사회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는 이러한 공동 이익을 기반으로 하여 통치되어야 한다.


주권은 일반의지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므로 결코 양도될 수 없으며 또 주권자는 집합적 존재에 불과하므로 집합적 존재 그 자체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고, 권력은 양도될 수 있지만 의지는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때에는 개인의 특수의지가 일반의지와 일치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일치가 영속적이고 항구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반의지는 평등을 지향하지만 특수의지는 그 성질상 불공평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설령 이해관계의 일치가 항상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증하기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일치란 인위의 결과라기보다는 우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의지는 일반의지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의지는 인민 전체의 의지이거나 아니면 그 일부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민 전체의 의지인 경우, 표명된 의지는 주권의 행위로서, 법률이 된다. 인민 일부의 의지인 경우, 그것은 특수 의지에 불과하며 따라서 행정기관의 행위로서, 기껏해야 일종의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의지가 성립되는데는 반드시 만장일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투표는 계산되어야 한다. 제외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일반성은 깨어지고 만다.


일반의지는 항상 올바르고 항상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인민의 결의도 이와 마찬가지로 항상 올바르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자기의 행복을 바라고 있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항상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민은 결코 부패하지는 않지만 흔히 기만을 당하는 수가 있다. 인민이 악한 것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이러한 경우뿐이다.


일반의지가 공동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인 데 대하여, 전체의지는 개인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특수의지들의 합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특수의지로부터 지나친 것과 모자라는 것을 상쇄하면, 그 차이의 합계로서 일반의지가 남는다.

인민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어떤 문제를 의결하려고 할 때, 그들 간에 생기는 작은 의견 차이의 총계에서는 항상 일반의지가 생겨나고 따라서 그 의결은 항상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일반의지가 충분히 표명되기 위해서는, 국가 내부에 부분적 사회가 없어야 하고 각 시민이 오직 자기의 의지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계약도 정치체에게 모든 구성원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의지에 의해서 지도되는 이 권력이 바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권이라 불리는 것이다.


권리가 평등해지고 그로부터 정의의 관념이 생기게 되면 각자는 자기의 문제를 가장 중시하게 되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일반의지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특정한 개별적 대상을 지향하면, 우리가 우리와 직접 관계가 없는 것을 판단하게 되어 우리를 인도해 주는 참된 공평의 원칙이 없어지기 때문에, 일반의지는 본래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기도 한다.


의지를 일반의지로 만드는 것은 투표자의 수가 아니라 투표자를 결합하는 공동 이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계약은 모든 시민들 사이에 평등을 확립하는 것으로, 시민은 모두 같은 조건을 따르기로 약속하고 따라서 모두 같은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계약의 성질상, 주권의 모든 행위 즉 일반의지의 모든 정당한 행위는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의무를 부과하거나 혜택을 베푼다.

정확히 주권의 행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위자와 하위자간의 약속이 아니라, 정치체와 그 구성원간의 약속이다. 그것은 사회계약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합법적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기 때문에 공평하며, 오직 일반의 행복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유용하고 공공의 힘과 최고의 권력에 의하여 보증되고 있기 때문에 확고한 것이다. 신민이 이 약속에만 복종하고 있는 한, 그는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사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계약의 결과 그들이 얻은 지위는 그 이전의 지위보다 좋아진 셈이다. 권리를 양도한 것이 아니라 유리한 조건으로 교환을 한 것이다. 즉 그들은 불확실하고 불안전한 생활 방식 대신에 훨씬 확실하고 안전한 생활방식을 얻고, 자연적 독립 대신에 자유를 얻으며, 타인을 해칠 힘 대신에 자기 자신의 안전을 얻고, 언제 정복당할지 모를 자기들의 힘 대신에 사회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얻는 것이다.


사회계약은 계약 당사자들의 생명 보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에게는 수단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 수단에는 다소의 위험과 때로는 상당한 희생까지도 수반된다.


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 우리는 그를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적으로서 처벌하는 것이다. 그 심리와 판결은, 그가 사회계약을 파괴하였고 따라서 이미 국가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증명이며 선언이다.


질서에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은, 인간 상호간의 계약과는 관계없이 사물의 본성에 따라 그러한 것이다. 모든 정의는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신만이 정의의 원천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공유이므로, 내가 아무것도 약속한 바 없는 사람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다. 나는 내게 불필요한 것만을 남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 상태에서는 법률에 의하여 모든 권리가 규정되어 있으므로 이와는 사정이 다르다.


입법행위란 일반의지의 행사에 불과하고 따라서 입법의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은 물어 볼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군주도 국가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군주가 법률 위에 있느냐는 것도 물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불공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법률이 불공정할 수 있느냐는 것도 물어 볼 필요가 없고, 나아가 법률이란 곧 우리의 의사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우면서도 어떻게 법률에 복종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물어 볼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어떠한 정부 형태를 취하든지간에, 법률에 의하여 지배되는 모든 국가를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국가가 법률에 의하여 지배될 경우에만, 공공의 이익이 우위를 차지하고 공공의 것이 중요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정부는 모두 공화적이다.


공화정이라는 말을 그 자체가 법률인 일반의지의 지도를 받는 모든 정부로 이해하고 있다.


인민은 항상 스스로가 자신의 행복을 원하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그 행복이 무엇인지를 항상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의지는 항상 올바르지만, 그것을 인도하는 판단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일반의지에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또 때로는 있어야 할 형태로 보여주어야 하고, 일반의지가 찾고 있는 바른길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특수의지의 유혹으로부터 일반의지를 보호하고, 또 시간과 장소에 유의하여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이익의 유혹과 멀리 숨어 있는 위험을 비교할 수도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개인들에게는 그들의 의지를 이성에 일치시키도록 강제해야 하고, 공중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공중은 계몽되어 정치체에 있어서 그들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각 부분의 정확한 협력이 이루어져 전체는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입법자가 필요한 이유이다.


모든 국민에게 가장 적합한 사회규칙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런 경험이 조금도 없으면서도 인간의 모든 욕정을 잘 알 수 있는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군주는 입법자가 정해 준 모형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입법자는 기계를 발명하는 技師지만 군주는 그 기계를 조립하여 운전하는 직공에 불과하다.


입법자는 모든 점에서 국가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재능에 있어서 탁월해야 하지만, 그 직무에 있어서도 탁월해야 한다. 그의 직무란 행정권도 아니고 주권도 아니다. 그의 직무는 국가를 조직하는 것이므로, 국가의 기구 안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는 특수하고 우월한 기능이다. 왜냐하면 만약 인간을 지배하는 자가 법률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법률을 지배하는 자도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법률은 입법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어, 종종 입법자의 부정을 계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법률의 제정을 외국인에게 의뢰


일반의지만이 개인을 구속할 수 있고, 또 어떤 특수의지가 일반의지에 합치되느냐의 여부는 인민의 자유투표에 의하지 않고는 확실히 판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입법이라는 작업에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발견된다. 하나는 그 작업이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너무나 이룩하기 어렵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런 권위도 갖지 않은 권위자가 그것을 실행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시대의 건국 지도자들이 인민들로 하여금 국가의 법률을 자연의 법률처럼 따르게 하기 위하여 천국의 간섭에 의존하고 신의 영광을 떠받든 이유이다. 그들 지도자들은 인민들로 하여금 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인간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처럼 신의 권위를 인정하게 함으로써, 인민들이 자진해서 복종하며 공공의 복지라는 굴레를 얌전하게 견디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입법자는 일반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이 숭고한 원리를 신의 권위를 빌어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지혜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을 통솔하려고 한다.


얄팍한 속임수로는 일시적인 관계밖에 형성할 수 없으며, 오직 참된 지혜만이 영원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일단 관습이 확립되고 편견이 뿌리를 박게 되면, 그것을 개혁하려는 노력은 위험하고도 무익한 일이 된다.


어떤 인민이라도 자기를 보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방의 압력이 실제로 동등하게 되도록 다른 모든 인민과 균형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국가를 만드는 것은 인민이고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은 영토이다. 그러므로 이 적당한 비율이란, 토지가 주민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해야 하고 그 토지가 부양할 수 있는 만큼 가능한 한 많은 주민이 있어야 하는 데 있다.


입법자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예견하 수 있는 상황에 의해서 판단해야 한다. 또 그는 현재 나타나는 인구보다는 장차 인구가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상황에 더 유의해야 한다.


평등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말이 권력과 재산의 정도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동등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법률이란 그 자체로서 훌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이 제정되는 국가를 위하여 가장 훌륭해야 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여러 관계를 고려하여 구체적으로 그 인민에게 가장 알맞은 제도의 체계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각 국민은 모든 국민에게 공통되는 원칙을 제외하고는 여러 원칙을 자기에게 알맞게 적용시켜야 할 원인을 그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입법은 구체적으로 자기에게 적합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 세가지 법률 이외에 넷째의 것으로서, 대리석이나 청동판에 새겨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마음 속에 새겨지는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법률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진정한 구조를 형성하는 것으로 날로 새로운 힘을 가지며, 다른 법률이 낡거나 효력이 없을 경우에 그것에 활력을 주고 또 그것을 대신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 설립의 정신을 유지하게 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권위의 힘 대신에 습관의 힘이 지배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도덕, 관습, 특히 여론이다. 이것은 현재의 정치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권력이지만, 실상 다른 모든 부분의 성공도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개별적인 규칙들은 둥근 지붕을 지탱하는 궁륭에 불과하지만, 관습과 도덕은 형성되는데 오랜 시일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그 지붕을 지탱하는 확고부동한 초석을 이루기 때문이다.


모든 자유로운 행위에는 서로 협력하는 두 개의 원인이 있다. 그 하나는 정신적 원인 즉 행위를 하도록 결정하는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 원인 즉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힘이다.


의지에 해당하는 입법권과 힘에 해당하는 집행권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이 둘의 협력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으며 또 되어서도 안 된다.


공공의 힘은, 그 힘을 한데 모아 일반의지의 지도에 따라 작용할 수 있게 하는 적당한 대리인을 필요로 한다.


정부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민과 주권자 사이의 상호 연락을 위해 설치된 중간적인 단체로, 법률을 집행하고 사회적․정치적 자유를 유지시키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인민 자신을 군주에게 복종시키는 행위는 결코 계약 행위가 아니라는 주장은 지극히 타당하다. 이 행위는 어디까지나 위임 또는 고용에 불과한 것이다. 통치자는 주권자의 단순한 관리이며, 그들에게 맡겨진 권력을 주권자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주권자가 통치를 하려 들거나 행정관이 법률을 제정하려 하거나 또는 신민이 복종하기를 거절한다면, 질서 대신에 무질서가 나타나고 힘과 의지는 더 이상 협력하지 않게 되며 국가는 해체되어 전제와 무정부 상태로 떨어지고 만다.


어떤 국가가 일만 명의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주권자는 오직 집합적으로 그리고 단체로서만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각 시민은 신민의 자격으로서는 하나의 개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권자와 신민의 권력상의 비율은 1만대 1에도 불구하고, 주권의 1만분의 1밖에는 자기의 몫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인민의 수자가 10만이 된다. 그래도 신민으로서의 지위에는 변화가 없으며, 따라서 각 신민은 전과 같이 법률의 전적인 지배를 받을 뿐이다. 반면에, 그의 투표의 영향력은 10만분의 1로 감소되어 법률의 제정에 있어서는 이전의 10분의 1정도의 영향력밖에는 갖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신민은 항상 하나의 단위로 머물러 있으므로, 신민에 대한 주권자의 비율은 신민의 수자에 비례하여 증대된다. 이렇게 볼 때, 국가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유는 그만큼 감소된다고 할 수 있다.


훌륭한 정부가 되기 위하여 정부는 인민의 수자가 증가하는 데 비례하여 더욱 강력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와 정부라는 이 두 단체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즉 국가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만, 정부는 주권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통치자가 지배하는 의지는 곧 일반의지 내지 법률에 불과한 것이며, 그 이외의 어떤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통치자가 어떤 전제적이고 자의적인 행위를 하려고 한다면, 그 즉시로 전체적인 유대는 해체되기 시작한다.


두 개의 주권자 즉 법률상의 주권자와 사실상의 주권자가 나타나게 되어, 사회적 결합은 즉시 깨어져 버리고 정치체는 해체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정부로 하여금 정부를 위해서 인민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서 정부를 희생시킬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하기야 정부라는 인위적인 단체는 국가라는 다른 인위적 단체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빌어 온 종속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정부가 그 힘을 정부 자신의 구성원을 위하여 많이 쓰면 쓸수록 인민 전체를 위하여 사용할 힘은 그만큼 적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행정관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정부의 힘은 약하게 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 가지의 의지를 구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적인 의지이고, 둘째는 단체의지, 셋째는 일반의지이다.

완벽한 입법에 있어서는, 개인의지 또는 특수의지란 완전히 없어져야 하고 또 정부에 고유한 단체의지도 극히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결과 일반의지 또는 주권자의 의지만이 항상 지배적으로 나타나 다른 모든 의지를 지도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의 질서에 따르면, 이들 여러 가지 의지는 한 곳에 집중될수록 더욱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래서 일반의지가 언제나 가장 약하고, 단체의지가 그 다음으로 약하며, 개인의지가 가장 강하게 된다.


그렇다면 정부 전체가 단 한 사람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 특수의지와 단체의지는 완전히 결합되고 그 결과 단체의지는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강도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힘의 행사는 의지의 강도에 좌우되고 또 정부가 가지는 힘의 절대량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활동적인 정부란 단 한 사람으로 구성된 정부라는 결론이 나온다.

반대로 정부에 입법권을 부여하고 주권자를 통치자로 만들며 시민들을 모두 행정관으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되면 단체의지는 일반의지와 혼동되어 일반의지 정도의 활동성밖에 갖지 못하게 되고, 특수의지만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항상 똑같은 힘의 절대량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볼 때 그의 힘이나 활동성은 최하위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정무를 담당하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 그 처리 속도가 늦어지고, 또 너무 신중을 기하면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여 행운을 잃게 되며, 나아가 지나치게 생각하면 생각의 목적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은 확실하다.


국가가 커질수록 정부는 축소되고, 인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통치자의 수는 줄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정부의 상대적인 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정부의 공정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에서와는 반대로, 행정관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단체의지는 그만큼 일반의지에 가까워지는 데 반하여,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단 한 사람의 행정관 아래서는 단체의지란 결국 단순한 특수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분류

첫째, 주권자는 정부를 인민 전체 또는 인민의 대다수에 위임함으로써 단순한 개인으로서의 시민보다도 행정관으로서의 시민의 수를 더 많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부 형태를 우리는 ‘민주정’이라 부른다.

다음으로, 주권자는 정부를 소수의 인민에게 위임함으로써, 행정관으로서의 시민보다도 단순한 개인으로서의 시민의 수를 더 많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정부 형태를 우리는 ‘귀족정’이라 부른다.

끝으로, 주권자는 정부 전체를 단 한 사람의 행정관에게 위임함으로써, 다른 모든 행정관들은 그들의 권력을 이 사람으로부터 받도록 할 수도 있다. 이 세 번째의 형태가 가장 흔한 형태로서 우리는 이를 ‘군주정’ 또는 ‘왕정’이라 부른다.


그뿐 아니라, 같은 정부라도 어느 점에서는 여러 부분으로 세분될 수도 있고 또 부분마다 각기 다른 정부 형태에 따라 통치될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이미 말한 세 가지 정부 형태를 결합하여 무수한 혼합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최선의 정부 형태란 어떤 것인가 하는 데 관해서는 어느 시대에나 많이 논의되어 왔지만, 어떤 동일한 정부 형태라도 어느 경우에는 최선의 것이나 다른 경우에는 최악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고려되지 않았다.

만일 여러 국가에 있어서 최고행정관의 수가 시민의 수와 반비례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면, 일반적으로 민주정은 소국에 적합하고 귀족정은 중간 정도의 나라에 그리고 군주정은 대국에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입법자가 부패하게 되면 국가는 그 근본에 있어서 부패되어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개혁도 불가능하게 된다.


민주정이라는 말을 엄밀히 해석한다면, 진정한 민주정은 이제까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수가 통치하고 소수가 통치받는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다. 인민이 공공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계속 모여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 처리를 위해 위원회를 설치하게 되면 그만 통치의 형태가 바꿔져 버리고 만다.


민주정이라는 정부형태는 실로 조화되기 어려운 숱한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첫째로 민주정은, 국민 모두가 한 곳에 쉽사리 집합할 수 있고 서로 쉽사리 서로를 다 알 수 있는 아주 작은 국가를 전제로 하고 있다. 둘째로 민주정은, 사무가 복잡하지 않고 귀찮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풍습이 극히 단순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민주정은, 인민의 지위와 재산이 상당한 정도로 평등할 것을 전제로 한다. 끝으로 민주정은 사치가 아주 적거나 전혀 없을 것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사치는 재산에서 생기거나 아니면 재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치는 부자도 빈자도 다 같이 타락시킨다. 부자는 소유에 의하여 그리고 빈자는 탐욕에 의하여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민주정 혹은 인민정체의 정부만큼 내란과 내분이 일어나기 쉬운 정부는 없다는 사실을 부언해 두고 싶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분만큼 강력하고 끊임없이 그 정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도 없으며, 또 이 정부만큼 그 유지에 경계와 용기를 요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신들로 구성된 인민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정부는 아마 민주적일 것이다. 그토록 완벽한 정체는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귀족정에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정신적인 인격, 즉 정부와 주권자가 있다. 그 결과 두 개의 일반의지가 있으니, 하나는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 구성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의지이다.


귀족정에는 자연적인 것, 선거에 의한 것, 세습적인 것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자연적인 귀족정은 소박한 인민에게 적합하고, 세습적인 귀족정은 최선의 정부로서 이것이 곧 본래 의미의 귀족정이다. 귀족정에는 두 가지 권력이 확실히 구별된다는 장점 이외에도, 그 구성원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왜냐하면 인민정체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행정관이 되지만, 귀족정에서는 행정관을 소수에 한정하고 있으며 더구나 선거에 의해서만 행정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성실․지식․경험 등으로 공중의 호평과 경의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행정관으로 박탈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따라서 이것은 장래 善政의 새로운 보증이 되고 있다.


요컨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을 위해서 정치를 한다는 것만 보장되면,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대중을 지배하는 것이 가장 좋고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귀족정에서는, 정부라는 단체의 이익 때문에 공적인 권력을 일반의지의 규칙에 따라 행사할 기회가 적어지고 집행권의 일부가 법률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쉽다는 불가피한 경향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귀족정은 인민정체에 요구되는 모든 덕성을 다 요구하지는 않지만 귀족정 특유의 다른 덕성을 요구한다. 예컨대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절제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요구하는 것이다.


군주정에서는 한 개인이 하나의 집합적 존재를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통치자를 구성하는 정신적 단위는 동시에 육체적 단위로서, 다른 정체의 경우에는 법률의 힘으로 겨우 결합할 수 있는 일체의 권능이 자연적으로 하나의 단위에 결합되어 있다.


국가기관의 모든 명령권이 동일인의 손에 장악되어 있어, 전체가 같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서로 마찰을 일으키는 운동의 충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보다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활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체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정만큼 활동력이 강한 정부는 없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그만큼 특수의지가 우위에 서서 다른 의지를 쉽사리 지배하는 정부도 없다. 모든 것이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목적이란 결코 공공의 복지는 아닌 것이다.

군주는 절대군주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멀리서 사람들은 항상 군주에게 외치고 있다. 이 격언은 대단히 좋고 또 어느 면에서는 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궁정에서는 그것이 늘 조소거리가 되고 만다. 인민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권력은 물론 가장 강대한 권력이지만, 그것은 불안하고 조건이 붙어 있는 권력이다. 그러므로 군주들은 결코 거기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군주라도, 자기의 지배권을 잃지 않으면서 마음 내키면 간악한 짓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법이다.


그들의 개인적 관심은 무엇보다도 인민이 약하고 빈곤하여 그들에게 완전히 복종한다는 조건만 성립되면 인민의 힘이 곧 군주의 힘이 되는 것이므로, 인민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 군주의 이익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통치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통치자와 신민 사이의 비율은 점점 작아져서 균등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민주정에서는 그 비율이 1:1, 즉 절대균등이 된다. 한편 정부가 한 사람의 손에 장악될 때는 그 ‘최대치’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통치자와 인민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국가는 결합의 유대를 잃고 만다. 그러한 결합의 유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중간적인 계층이 필요하다. 즉 왕족, 고관, 귀족 등이 그 계층을 메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군주정을 항상 공화정보다 못한 것으로 만드는 근본적이고도 불가피한 결점은, 공화정에 있어서는 자기의 직무를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는 학식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인민의 소리(여론) 때문에 최고의 공직에까지 올라갈 수 없는 반면에, 군주정에 있어서는 출세를 하는 자의 대부분이 소인배․협잡꾼․모사꾼 들이라는 점에 있다.


군주국이 잘 통치되기 위해서는 그 인구와 영토의 크기가 통치자의 능력에 적합해야 한다. 정복은 통치에 비하면 훨씬 쉬운 일이다. 길이가 충분한 지렛대만 있으면 한 손가락으로도 충분히 지구를 움직일 수 있지만, 그것을 받치고 있으려면 헤르쿨레스의 어깨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왕국은 군주의 능력에 따라 각 치세마다 영토를 확대하거나 축소해야만 한다. 그러나(귀족정에 있어서는) 원로원의 능력에 보다 확실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국가는 통치에 손상을 입지 않고도 고정된 국경을 가질 수 있다.


국가를 돈으로 사들인 자도 이번에는 자기가 그것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강자로부터 약탈당한 금전을, 약자를 희생시켜 보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역사상 이름있는 위대한 국왕들은 그 누구도 통치하기 위한 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통치라는 기술은 많이 배운다고 해서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며, 명령하기보다는 복종함으로써 더 잘 알게 되는 기술이다. 왜냐하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하고 가장 빠른 방법은, 당신이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을 때 당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바라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군주국에서는 거의 모든 국왕이나 대신들이 모든 점에 있어서 선임자들과는 다른 정책을 취하는 것을 공통의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내각에 변동이 생긴다는 것은 곧 국가에 변동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말한바와 같이 天生의 국왕이 드물다고 한다면, 자연과 요행이 일치하여 그런 인물을 왕위에 오르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겠는가?


군주정 그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능하거나 악질적인 군주하에 있을 때는 어떠한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군주란 무능하거나 악질적인 인간이 되어서 왕위에 오르거나, 아니면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렇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단일정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원수가 다스린다고 해도 그 밑에 여러 명의 부하가 있어야 하고, 인민정체의 정부라고 해도 한 사람의 원수는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집행권의 분할에는 항상 다수로부터 소수에까지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다만 때로는 다수가 소수에 종속하고 또 때로는 소수가 다수에 종속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부를 분할하면 정부 전체로서는 신민에 대하여 같은 권위를 갖게 되지만, 정부 각 부분의 주권자에 대한 지배력은 약화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너무 이완되어 힘이 약할 때에는, 집정 관청을 설치하여 정부의 힘을 집중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모든 민주정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첫 번째 경우 정부를 분할한 것은 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정부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정부에서도, 공적인격이라는 것은 소비만 할 뿐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소비하는 물자는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구성원의 노동에서 온다. 공공의 필수품은 모두 개인들의 여분으로 충당된다. 따라서 사회상태는 인간의 노동이 그 수요 이상의 것을 생산하는 경우에만 존속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조세부담은 과세액의 양에 의하여 측정될 것이 아니라, 세금이 그것을 납부한 사람의 손에 되돌아가는 과정의 거리에 따라 측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유통이 신속하고 순조롭게 되면, 납세액의 多寡는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인민은 항상 부유하며 재정은 항상 건전할 것이다. 반면에 인민이 지불하는 세액이 아무리 적더라도 그것이 조금도 인민의 손에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인민은 계속 지불만 하게 되므로 결국 그 재산은 모두 고갈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국가도 결코 부유해질 수 없으며 인민도 언제나 거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민과 정부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조세의 부담은 더욱더 무거워진다는 결론이 된다. 이렇게 볼 때, 민주정에 있어서는 인민의 부담이 가장 가볍고, 귀족정에 있어서는 그것이 좀 더 무거우며, 군주정에 있어서는 인민의 부담이 가장 무거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정은 부유한 국민에게만 적합하고, 귀족정은 면적이나 재산 정도가 중간쯤 되는 나라에 적합하며, 민주정은 가난하고 작은 나라에 적합하다.


전제정치는 신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신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제정치는 더운 나라에 적합하고 야만 상태는 추운 지방에 알맞으며, 좋은 정치는 온대 지방에 적합하다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면적에 비해 인구가 가장 적은 나라에 전제정치가 가장 적합하다. 맹수는 오직 황야에서만 군림하는 것이다.


군주국의 신민은 국가의 평온을 찬양하지만, 민주국의 시민은 개인의 자유를 찬양한다. 전자는 재산의 안전을 바라지만, 후자는 신체의 안전을 바란다. 또 전자는 가장 엄격한 정부를 가장 훌륭한 정부라고 생각하지만, 후자는 가장 관대한 정부를 가장 훌륭한 정부라고 주장한다.


정치적 결사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 구성원의 보존과 번영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보존과 번영을 표시해 주는 가장 확실한 특징은 무엇인가? 그들의 수, 즉 인구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고 하면 외국의 원조도 받지 않고 귀화나 이민에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수를 가장 잘 증가시킬 수 있는 정부야말로 틀림없이 가장 훌륭한 정부인 것이다.


정부가 타락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정부가 축소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해체되는 경우이다. 정부가 축소되는 경우는, 그 구성원의 수가 다수에서 소수로 바꿔어질 때, 즉 민주정에서 귀족정으로 바뀌고 귀족정에서 군주정으로 바뀔 때이다.

약간의 혼란은 인간의 정신에 탄력을 준다. 그러므로 인류를 진실로 번창하게 하는 것은 평화라기보다 자유인 것이다.


국가가 와해되는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통치자가 법률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지 않고 주권을 찬탈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현저한 변화가 일어난다. 즉 정부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축소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긴 국가는 모든 인민에 대해서는 다만 지배자 내지 폭군의 역할밖에 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정부가 주권을 찬탈하면, 그 즉시 사회계약은 파기되고 개인으로서의 모든 시민은 당연히 자연적 자유를 회복하며, 따라서 복종을 강요당하더라도 복종할 의무는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첫 번째 경우에 못지 않은 법률 위반이며, 더 큰 혼란을 초래한다. 행정관의 수만큼 통치자의 수가 많아져서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가도 분열되기 때문에, 국가는 멸망하거나 그 형태를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국가가 와해되는 경우에, 정부의 악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무정부 상태’라는 공격의 성격을 띤다.


통속적인 의미로 참주라는 것은 정의와 법률에 구애되지 않고 폭력에 의해서 통치하는 국왕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참주란, 왕의 권리를 소유할 만한 권한이 없는 사람으로서 왕권을 찬탈한 개인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참주’와 ‘찬탈자’는 완전히 동의어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참주와 국왕을 구별하여, “참주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하는 자이고, 국왕이란 오직 신민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하는 자”라고 하고 있다.


나는 왕권을 찬탈한 자를 ‘참주’라고 부르고, 주권을 찬탈한 자를 ‘전제군주’라고 부른다. 참주란 법률을 위반하여 왕권을 장악했지만 법률에 따라 통치하려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전제군주란 법률 그 자체를 초월하려는 자를 말한다.


인간의 체격은 자연이 만드는 것이고, 국가의 구조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일은 인간의 능력으로써는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국가에 가장 훌륭한 제도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다.


정치체의 생명의 근원은 주권에 있다. 입법권은 국가의 심장이고, 집행권은 모든 부분에 운동을 보내주는 두뇌이다. 두뇌가 마비되었는데도 개인이 살아 있는 경우는 있다. 바보처럼 되어서라도 그 생명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장이 기능을 정지하게 되면, 동물은 즉시 죽어 버린다.

국가가 존속하는 것은 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입법권에 의해서이다.


주권자는 입법권이외에는 어떠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직 법률에 의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법률은 오직 일반의지의 정당한 행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주권자는 인민이 집회하였을 때 이외에는 행동할 수가 없다.


첫째로 주권은 단일한 것으로서 분할하면 반드시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둘째로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합법적으로 종속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도시도 다른 도시에 합법적으로 종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체의 본질은 복종과 자유가 합치되는 데 있고, ‘신민’ 과 ‘주권자’라는 말은 동일한 내용의 양면을 나타내 주는 것에 불과하며, 양자의 개념이 모두 ‘시민’이라는 하나의 말 속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도를 고정하지 않는 방법으로서, 정부의 소재를 여러 도시로 옮겨 가면서 두고 거기서 차례대로 집회를 여는 방법이다.

국내의 인구 분포를 고르게 하고 모든 지역의 주민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며 모든 곳에서 富와 생명을 증대시켜 나가면, 국가는 멀지 않아 가장 강대해질 것이며 가장 잘 통치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성벽은 시골의 농가를 부순 조각으로만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도에 세워진 모든 궁전을 볼 때마다 나는 한 지방 전체가 폐허화하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인민이 주권을 가진 단체로서 합법적으로 집회를 하는 순간부터, 가장 비천한 시민의 인격이라도 최고행정관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신성불가침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대표자를 내세우는 본인이 직접 출석하고 있는 곳에서는 이미 대표자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욕심이 많고 비겁하며 무기력하여 자유보다도 안일을 더 좋아하게 되면, 정부가 완강하게 가해 오는 압력에 대항하여 오래 견딜 수가 없다. 그 결과, 정부의 압력이 부단히 증가됨에 따라 주권은 드디어 소멸하게 되고, 도시국가의 대부분도 그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와해되어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돈으로 선물을 하는자는 멀지 않아 속박의 사슬에 매이게 마련이다. (의무나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대신 지불하는 돈을 뜻하는) ‘피낭스’라는 말은 원래 노예의 말로서, 도시국가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말이었다. 정말로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모든 일을 직접 자기의 손으로 하지 무엇이나 돈으로 처리하지는 않는다.


국가가 잘 조직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시민들의 마음속에 공적인 일이 차지하는 비율이 사적인 일보다 더 큰 법이다. 또 사적인 일은 공적인 일보다 그 중요성이 훨씬 적어져 간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공동의 행복이 개인적인 행복보다도 개인의 마음속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마련이므로, 개인들이 자기의 행복을 찾기 위하여 개인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질서가 잘 잡혀있는 나라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집회에 모여들지만, 나쁜 정부 밑에서는 아무도 집회에 나가려고 발을 떼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거기서 행해질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고, 또 거기서는 일반의사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미리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 가사에나 몰두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국가의 사무에 대하여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말한다면, 그 국가의 운명은 이미 끝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애국심의 감퇴, 이기심의 횡행, 국토의 지나친 면적, 정복, 정부의 악폐 등이 국민의 집회에 인민의 대의원 또는 대표자를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 내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어떤 나라에서는 감히 제3신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일이다.


주권이 양도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 주권은 본질적으로 일반의지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일반의지는 결코 대표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의지란 그 자체이든지 아니면 별개의 것이어서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대의원은 인민의 대표자가 아니며 대표자가 될 수도 없다. 그들은 인민의 사용인에 불과하며, 따라서 무슨 일이든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민이 직접 승인하지 않은 법률은 모두가 무효이며, 결코 법률이라고 할 수가 없다.


대표라는 개념은 근대에 와서 생긴 것이다. 그것은 봉건정치, 다시 말하면 그토록 간악하고 불합리하며 인간을 타락시키고 인간이라는 이름을 모독하는 봉건정치에서 유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법률이란 일반의지의 표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입법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대표자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법률에 효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적용되는 힘에 불과한 집행권을 행사하는데 있어서는 대표자를 내세울 수 있고 또 내세워야만 한다.


그리스에 있어서는 인민이 해야 할 일은 모두 인민 스스로가 직접 처리했다. 그들은 늘 광장에서 집회를 했다. 그들은 온화한 풍토에서 살았으며, 지나친 욕심을 갖지 않았다. 노예가 그들을 위해 일해 주었으므로 그들의 중요한 관심은 자유에 놓여 있었다.


우리들은 자유보다도 돈벌기에 더욱 여념이 없고, 노예로 살기보다는 가난하게 살기를 더욱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에 위반되는 것에는 무엇이나 불편이 따르게 마련이며, 특히 정치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세상에는 타인의 자유를 희생시켜야만 자기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고, 노예가 철저히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시민들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불행한 상황도 있다. 스파르타의 경우가 그러했다. 여러분은 근대인이므로, 노예를 거느리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러분들 자신들이 노예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은 자신의 자유를 지불하고 노예의 자유를 산 것이다.


나는 다만 고대의 인민들이 대표자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믿고 있는 근대의 인민들이 왜 대표자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데 대한 이유를 내세우는 순간부터 그 인민은 이미 자유롭지 않게 되고 인민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시민들은 사회계약에 의하여 모두 평등하게 되었으므로, 모두가 같이 해야 할 일이라면 누구에게나 하라고 명령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자기 자신이 하지 않는 일을 타인에게 하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 주권자가 정부를 수립할 때, 통치자에게 부여하는 것이 바로 이 권리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체에 생명과 활동력을 주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권리인 것이다.

한때 이러한 정부의 수립 행위는 인민과 인민 스스로가 추대하고 있는 지배자와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계약에 의하여 당사자간에 한 쪽은 명령하는 의무를 지고 다른 한 쪽은 복종하는 의무를 진다는 조건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계약치고는 정말 괴상한 계약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주권자가 스스로 자기 위에 상위자를 추대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며 모순되는 일인 것이다.

게다가 인민과 어떤 특수한 개인과의 사이에 맺어진 이러한 계약은 명백히 하나의 개인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이 행위는 법률일 수도 없고 주권자의 행위일 수도 없으니, 결과적으로 그것은 불법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권력을 장악한 자는 항상 그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계약은 마치 “당신에게 나의 모든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당신이 돌려주고 싶은 만큼만 내게 돌려주십시오”라고 한 행위에 계약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국가에는 단 하나의 계약밖에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계약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결합의 계약이다.

그러면 정부 수립 행위는 어떤 각도에서 고찰해야 할 것인가?

제1의 행위 즉 법률을 제정하는 행위에 의하여, 주권자는 이러이러한 형태로 정부라는 하나의 단체를 수립한다는 점을 규정한다. 이 행위는 분명히 법률이다.

제2의 행위 즉 법률을 집행하는 행위에 의하여, 인민은 수립된 정부를 위임받을 통치자를 임명한다. 이 임명은 하나의 개별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제3의 법률이 아니라 다만 제1의 법률의 결과이며 정부의 한 기능에 불과한 것이다.


일반의사가 단순한 행위에 의하여 실제로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정치의 특별한 장점이다. 그리하여 일단 수립된 임시정부의 형태가 그대로 채택되면 그 정부가 그대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주권자의 이름으로 법률에 의하여 정해진 정부를 수립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법률에 따라 시행되는 것이다.


정부를 수립하는 행위는 계약이 아니라 법률이라는 것, 집행권을 위임받은 자들은 결코 인민의 주인이 아니라 그 공복이라는 것, 인민은 마음대로 그들을 임명하거나 해임할 수 있다는 것, 집행권을 위임받은 그들에 있어서 문제는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체결된 계약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국가에 의하여 부과된 직무를 수행하는 것도 다만 시민으로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을 뿐, 그 조건에 대해서 논의할 권리는 그들에게 없다는 것 등이다.


사회계약의 유지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 집회는 반드시 다음 두 가지 의안을 다루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의안은 결코 생략되어서는 안 되며, 각각 따로 투표에 붙여져야 한다.

제1의안 - <주권자는 현재의 정부 형태를 그대로 요구하기를 원하는가?>

제2의안 - <인민은 현재 통치를 위임받고 있는 자들에게 앞으로도 그것을 계속 위임하기를 원하는가?>


다수의 사람들이 결합하여 스스로 일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은 공동의 생존과 전체의 행복이라는 단 하나의 의지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국가의 모든 기능은 활발해지고 단순해지며, 그 통치원리도 명백해지고 빛나게 된다. 그리고 이해관계의 혼란이나 모순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 공동의 이익은 어느 곳에서나 분명하게 나타나서, 공식만 있으면 누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들은 순박하기 때문에 잘 속지 않는다. 유혹이나 감언에도 잘 넘어가지 않는다.


(순박하게)통치되고 있는 국가에서는 법률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새로운 법률을 제정할 필요가 생기면, 그 필요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같이 느껴진다. 그것을 처음 제안하는 사람은 이미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을 다만 말로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마음먹고 있는 것을 법률로 제정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므로 이미 술책도 웅변도 필요하지 않다.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만 제외하고 나면,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누구 못지않을 만큼 강하게 공동의 이익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투표권을 돈 받고 팔았을 때에도, 자기의 마음속에서 일반의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피한 것이다.


회의에 있어서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즉 의견이 만장일치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일반의지도 역시 우세한 것이다. 반대로 토의가 길어지든지 의견이 분열되든지 회의장이 소란하든지 하는 것은, 모두 개인적인 이익이 우세하여 국가가 쇠퇴해 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성질상 만장일치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법률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계약이다. 왜냐하면 시민의 결합은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자발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어떤 종류의 구실을 붙이든지간에, 그의 동의를 얻지 않고는 그를 복종시킬 수가 없다.


국가가 건설될 때 그 국토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그 국가를 승인하는 것이 된다. 국가의 영토 내에 거주한다는 것은 그 국가의 주권에 복종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최초의 계약(사회계약)이외의 경우에 있어서는, 다수의 의견이 항상 다른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모든 국가 구성원의 변함없는 의지가 일반의지이다. 이 일반의지에 의하여 그들은 시민이 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어떤 법률이 인민의 집회에 제출되었을 때 그들이 대답해야 할 문제는, 이 제안을 그들이 승인하는가 또는 부인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법률이 인민의 의지 즉 일반의지에 합치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이 우세를 차지했을 때, 그것은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 즉 자기가 일반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실은 일반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한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어느 정도 비율의 투표수가 있으면 일반의지라고 해도 좋은가


이 비율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일반적 원칙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토의 사항이 중대하면 중대할수록 승리를 거두는 의견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토의사항이 긴급을 요하는 일이면 일일수록 정해진 비율의 차이가 좁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즉 당장 결정지을 필요가 있는 사항의 경우에는 한 표의 차이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드 둘 중에서 첫째 원칙은 법률을 제정하는 데 적합하고, 둘째 원칙은 행정 처리에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추첨에 의한 선출이 민주정치의 본질에 적합하다”고 몽떼스키외는 말하고 있다. 나도 같은 의견이다.

“추첨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선거방법이다. 그것은 각 시민에게 조국에 봉사할 수 있다는 정당한 기대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민주정치에 있어서는 행정이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그만큼 더 훌륭한 행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정치에 있어서는 어느 곳에서나, 행정관이 된다는 것은 이익이 아니라 무거운 부담이 되므로, 이것을 어는 특정 개인에게 지게 하는 것은 확실히 정당하지 못하다. 오직 법률에 따라 당첨자에게 이것을 부담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조건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여 누가 당첨될 것인가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므로, 누가 당첨되든 법률의 보편타당성에 위반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첨에 의한 선출은 진정한 민주정에 있어서는 아무런 폐단도 자아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정에 있어서는, 생활신조와 재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도덕과 재능에 있어서도 모두가 평등한 탓으로, 누가 선출되든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선거와 추첨이 혼용되는 경우 군직과 같이 특수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지위는 선거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


군주정에서는 추첨도 투표도 행해질 여지가 없다. 군주만이 유일한 통치자이고 행정관이기 때문에, 그 보좌관의 선임권도 오직 군주에게만 속해 있다. 


어떠한 법률의 승인도, 그리고 어떠한 행정관의 선출도 오직 민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호민관은 국가의 구성 부분이 아니다. 따라서 입법권이나 집행권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호민관의 권력은 두 권력보다도 크다. 왜냐하면 호민관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반면에, 무슨 일이나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민관은 법률의 수호자이기 때문에 법률의 집행자인 정부나 법률의 제정자인 주권자보다도 더 신성하고 존경받는 것이다.


현명하게 절도를 지키는 호민관은 훌륭한 국가조직의 가장 견고한 기둥이 된다. 그러나 그 힘이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


법률이란 원래가 융통성이 없는 것이므로 상황의 변화에 일일이 적응하지 못할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유해한 작용을 할 때도 있고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는 국가의 멸망을 초래하기도 한다.

법률의 절차가 요구하는 순서와 번거로움은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를 필요로 하지만, 때로는 상황이 이 이유를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다.


확실히 위험한 경우가 발생하면, 특수한 행위에 의하여 가장 적합한 인물에게 공안 유지의 임무를 위임함으로써 공안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 위임은 다가올 위험의 성질에 따라 두 가지의 방법으로 할 수 있다.

만일 위험이 정부의 활동력을 증대시키기만 하면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정부의 권력을 한두 사람의 구성원에게 집중하는 것이 좋다. 이 경우 변경되는 것은 법률의 권위가 아니라 그 집행 형식뿐이다. 반면에 위험이 법률은 운용하면 도리어 더 증대되는 성질의 것이라면, 한 사람의 최고지도자를 지명하여 그로 하여금 모든 법률을 정지시키게 하고 당분간 주권을 정지시키게 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경우에도 일반의지의 존재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면, 인민이 가진 최대의 관심은 확실히 국가가 멸망하지 않게 하는 일인 것이다.


절박한 필요성이 사라지면 독재자는 폭군이 되든지 무용한 존재로 되어 버린다.


일반의지가 법률을 통해서 표명되듯이, 공중의 판단은 감찰을 통해서 표명된다.


지상의 모든 인민은 그들의 쾌락을 자연에 의하지 않고 여론에 따라 결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론을 바로잡으면 도덕은 저절로 정화된다. 사람들은 항상 선한 것, 또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무엇이 선한 것이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잘못을 저지른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이 판단을 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덕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곧 명예가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이며, 명예가 무엇인가를 판단하려는 사람은 그 원리를 여론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인민의 여론은 그 국가의 구조로부터 생긴다. 법률이 도덕을 규제하지는 않지만, 도덕을 만드는 것은 입법이다. 입법이 약해지면 도덕도 타락한다.

따라서 감찰은 도덕을 유지시키는 데는 유효하지만, 이미 타락해 버린 도덕을 회복시키는 데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다.


감찰제도는 여론의 부패를 방지하고, 현명한 판단에 의하여 여론을 올바르게 유지시키며, 여론이 아직 불안정할 때는 그것을 안정시키기도 함으로써 도덕을 유지시킨다.


홉즈는 정치적 통일이 없으면 어떠한 국가나 정부도 그 조직이 바로 구성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독수리의 두 머리를 하나로 결합하는 것 즉 정치적 통일을 단호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전적으로 심령의 종교이다. 따라서 오직 천국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종교이다. 그리스도교의 조국은 이 세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들이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하는 데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이 오직 의무만을 수행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