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노동은 육신의 건강보다도 쾌적한 정신상태를 위해서 필요한 동작이다.
피카소의 상징에서 소는 권력을, 말은 국민을 뜻한 것이라고 한다.
나누어 가질 때 개인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개인은 한낱 국지적인 실재로서 특수한 환경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국지적인 실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살아 움직이는 보편적인 존재다. 인간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다.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은 티끌보다도 더 겸손해야 한다.
진리 또는 정의란 굳을 때는 금강석 같다가도 부드러울 때는 꽃 같은 것이기도 하다.
얼굴은 가려진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무슨 일이건 생각이 떠올랐을 때 바로 실행할 일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따로 시절이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의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이 지구상에서 자기의 특성을 실현하도록 초대받은 나그네들이다.
사람의 얼굴은 사랑으로 둘러싸이지 않을 때는 굳어진다.
맑은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빈 꺼풀
자기얼굴은 자기가 만든다고 했다. 자기가 만든다는 말은 동시에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이 마흔을 넘어서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네
어떤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옴짝 못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 흐름을 따라간다면 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사람은 내일에 가서 잘 사는 게 아니라, 그날그날을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한다면 그 미래조차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보살은 이웃을 이롭게 하는 일로써 존재 의미를 찾으며 그 안에서 생명의 환희를 누리는 구도자다. 화엄이란 꽃으로 장식한다는 뜻의 비유인데 꽃은 보살의 이타적이며 실천적인 행위를 말한다.
각황이란 부처님을 깨달음의 왕이란 뜻으로 부른 말이다.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륙전이었다. 석가모니의 몸을 가리켜 丈六金身이라고 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차지할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은 볼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볼 줄만 안다면 언제 어디서나 그 안목으로 보고 즐길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보물을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그에게 안목이 없다면 그는 한낱 물건의 관리인에 불과하다.
오늘처럼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회 속에서 제정신을 잃고 떠밀려만 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속물이 되고 만다. 그래서 모처럼의 여가를 가지고도 닳아진 인간의 영역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더욱더 소모시키고 있다. 제정신을 차리고 살려면 무엇보다도 정신을 집중하고 몰입하는 일이 필요하다.
인간이란 무언가 반드시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믿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기가 하고 있는 일과 그 의미를 믿는 것도 하나의 신앙일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순간순간 하는 일이 우리들 자신을 형성하고 그런 일 속에서 삶의 질을 높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과 성의를 다한다면 막혔던 길도 저절로 열리게 마련이다.
삼매의 경지-사람과 일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사람이 일 그 자체가 되어 순수하게 몰입하여 지속하고 있는 동안은 자신도 사물도 의식되지 않는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탓. 一切唯心造!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끝없는 개선의 길이다. ‘그가 하는 일이 곧 그 사람’임을 명심해야겠다.
절대고독이란, 의지할 곳 없이 외로워서 흔들리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당당한 인간 실존의 모습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버린 것은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현재의 일을
이모저모로 자세히 살펴
흔들리거나 움직임 없이
그것을 잘 알고 익히라.
대장경 중 《一夜賢者經》에서
현재에 충실하여 마음껏 존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살생을 하면 우리 심성에 갖추어진 자비의 씨앗도 동시에 죽게 된다. 인간이 만물 가운데 영장이라고 하는 말은 다른 생물보다 힘이 세거나 지혜가 뛰어나다고 해서가 아니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웃에게까지 청정한 인간의 본성인 사랑을 널리 베푸는 데에 그 의미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 그 마음을 맑히려면 진실한 말로써 진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계율이란 이런 것이다. 그것은 문과 같아서 닫아놓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활짝 열릴 수도 있어야 한다. 물론 보다 큰 이익과 의로움을 위해서라는 전제하에서, 이를 불교적인 용어로 開遮法, 즉 열고 닫는 법이라고 한다.
텅 비우기만 하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無一物中無盡藏]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 하루하루 무엇인가 이루어지고 되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목적이 아니고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도착이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 路程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가리켜 나그네길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듣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이 聞․思․修를 통해 되풀이되는 일상의 반복을 거듭거듭 심화시키고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온 힘을 기울여 배우고 익히고 있는 동안은 늙거나 병들거나 죽을 수 없습니다. 의지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이 멈출 때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문을 두드립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준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사람이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 길이 있다.
옛날의 농부와 수공업자들은 그 일 자체에서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일에 쫓기지 않고 그 일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니 제 정신을 잃지 않고 삶에 여유와 운치를 지니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가 가장 현명한 정부’
마하트마 간디-질서가 잡힌 나라에서는 발전을 富로 측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과 지도자의 순결(사회 윤리)만이 국가의 진정한 재산이 될 수 있다고 했다.
小欲知足-조그마한 것으로 넉넉한 줄 안다면 그는 살줄을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행위가 그 사람의 지식보다 뛰어날 때 그 지식은 유익하다. 그러나 그 지식이 그 사람의 행위보다 크게 드러날 때 그 지식은 무익한 것이다. 진짜 수행자는 그 어떤 종파를 막론하고 앞뒤가 툭 트인 단순성에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조그만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면서 내 식대로 살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 지극히 선한 것들을 지켜보면서 함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간다.
여럿 가운데 끼게 되면 내 식대로 살 수 없는 제약이 따른다. 뭣보다도 홀로 있을 때의 그 적적하고 홀가분한 맛을 누릴 수 없다. 적적함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발가벗은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길을 떠나는 것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관계의 울타리에서 떠나봄으로써 자신의 실체를 보다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낯선 고장의 인정이나 풍물을 통해 가려진 내면의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물의 이치는 일시에 이해할 수 있지만 행동은 반복된 훈련을 통해서만 몸에 밸 수 있다.
종교의 본질만이 아니라 온갖 사회현상의 핵심은 말보다도 살아 있는 행동에 있다. 지혜와 사랑과 덕의 실천행, 특히 선불교의 경우 절대적인 진리를 체험했다면 보편적인 현실세계에까지 그 진리가 확산되어야 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바람소리와 새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꽃의 아름다움과 그 향기도 맡아보고 시냇물소리에 귀를 모을 수도 있어야 한다. 흘러가는 구름에 마음을 실어보내기도 하고, 밤하늘의 별이나 달빛에 흐려진 눈을 씻기도 해야 할 것이다. 생명이 없는 박제된 현대의 도시 문명, 그 오염을 씻어내려면 자연의 손길밖에 없다.
귀가 곤욕을 치르는 전자시대
가뭄 끝에 내리는 빗소리, 그것은 감미로운 음악이다.
잠든 숲에 시냇물소리만 깨어있다. 밤 시냇물소리, 그것은 쉬지 않고 흐르는 세월의 소리이다.
산에 묻혀서 살면 보고 듣는 것이 그뿐이라 자연히 산을 닮게 마련이다.
사람은 이따금 틀에 박힌 예정에서 벗어나 마음 내키는 대로 가다 보면 거기서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수가 있다.
사라봉의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제주에 간 나그네로는 한번 보아둘 만한 장관이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고되고 바쁠지라도 더러는 저녁노을에 눈을 돌려볼 일이다. 줄곧 밖으로만 겉돌던 우리들의 생각과 감정을 이런 시각에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이런 내적 수습이 없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소유의 많고 적음을 물을 것 없이 우리들의 삶은 항시 모순과 불안과 갈등으로 얼룩지게 될 것이다.
맑게 갠 날만이 아름다운 노을을 남기듯이 우리가 자기 몫의 삶을 다했을 때 그 자취는 선하고 곱게 비칠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표현을 빌린다면, 삶은 놀라울 만큼 깊고 넓은 그 무엇이다.
젊어 있을 동안 삶을 알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황폐한 내면을 지닌 채 늙어갈 것이다. 밖으로는 돈을 가지고 미끈한 차를 타면서 뽐낼지 모르지만, 안으로는 무디고 텅 빈 사람이 될 것이다.
수목은 오래될수록 늠름하고 기품이 있지만, 사람은 살 만큼 살면 헌 수레와 같이 삐그덕삐그덕 고장이 많고 주책을 떨다가 추해지게 마련이다.
문제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있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조금 전의 그 아찔한 허무감은 이내 지워지고 말았다.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인간답게, 내 자신답게 후회 없이 사는 일이 새로운 과제로 다가섰다.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니고 있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한평생을 두고 수많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계절이 내린 고마운 뜻을 몇 번이나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가
眞空妙有! 텅 빈 그 속에 무한한 잠재력이 날개를 편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이 풍성해진다. 이 넉넉하고 풍성한 마음이 우리 눈을 밝게 한다. 이 마음이 우리를 창조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一刀兩斷, 한 생각 크게 돌이키고 났을 때의 그 홀가분함을 우리는 크고 작은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은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을 쓸 줄 안다면 우선 고정관념의 늪에서 벗어나 텅 비우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마음을 비우려면 무엇엔가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쓸데없는 대화를 피해야 한다. 홀로 있으면서 발가벗은 자기 세계를 철저히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의 소리는 굳이 밖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나 물소리만이 아니다. 더 원천적인 자연의 소리는 내 마음에서 울려오는 소리일 것이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을 觀이라고 한다. 자신의 마음을 관하는 정진이 일상의 온갖 행위를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그는 아무리 막되고 어지러운 세상에 살지라도 결코 제정신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느끼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환경이나 조건 아래서라도 인생은 분명히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한다. 멀고 거창한 데서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탐구하는 노력이 없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속물이 되고 만다. 하루하루 사는 일이 그저 그런 날의 연속이라면 삶 자체가 시들해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의 의미와 그 고마움을 놓치고 만다. 탐구하는 노력을 통해서 삶의 질을 얼마든지 높여갈 수 있고, 그때마다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나는 보다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없는 듯이 살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그 어떤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자신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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