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양식

조선왕조실록(박영규)

엔젤트럼펫 2007. 10. 9. 14:50
 

1. 태조(1335-1408, 재위기간 6년2개월) : 원의 관리였던 이자춘의 아들

   무학대사, 정도전(조선경국전), 숭유억불(성균관, 향교설치), 과전법실시, 한양천도

 *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 방석(여덟째)의 세자결정에 방원(다섯째)이 반발하여 방석과  방 번(일곱 째) 살해, 정도전 일파제거 - 이로인해 방과(둘째)에게 왕위 물려줌

 * 제2차 왕자의 난(1400년) - 방간(네째)의 난 방원이 진압하고 왕위에 오름, 태조는 방원에 대한 증오로 함흥에 머물며 문안보내는 차사를 모두 죽임(함흥차사)


2. 정종(1357-1419, 재위기간 2년2개월) : 태조의 둘째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태조의 하야로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방 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은 유명무실한 상태로 방원이 권력을 쥐고 있었음 - 목숨보전  위해 정무보다는 유유자적한 생활하다 방원에게 왕좌 양위, 1399년 개경천도


3. 태종(1367-1422, 재위기간 17년 10개월) : 태조의 다섯째(이방원)

   왕권강화, 노비제도 정비, 신문고설치, 과거제도, 불교와 도참사상 억제, 한양천도, 호패 법실시, 화폐개혁(저화도입-사섬서설치)

 * 양녕대군(장남)-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궁중생활 적응하지 못함. 기이한 행동으로 세자에서 폐위됨

 * 효령대군(둘째)-동생이 세자에 책봉되자 스스로 절로 찾아들어 불교에 심취, 성격이 유 순하고 권력에 관심이 없는 인물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 불교발전에 기여함

 * 충녕대군(세째, 세종)


4. 세종(1397-1450, 재위기간 31년 6개월) : 태종의 셋째

   태종이 이룩해 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한 시기. 집현전을 통한 인재배출, 훈민정음 보급,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

   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 민족국가의 기틀 확고히 다짐

   명재상 - 황희, 맹사성 / 장영실,박연, 정초, 김종서

  * 첫째(문종)

  * 둘째(세조 - 수양대군)

  * 셋째(안평대군) - 수양대군 측의 무신세력과 맞섬, 계유정난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36세에 사사됨

                     시, 서, 화에 모두 능함


5. 문종(1414-1452, 재위기간 2년 3개월) : 세종의 장남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어질고 착했으나, 병약하여 재위기간 대부분 병상에서 보

   냄. 세종의 병 악화로 8년간의 섭정을 하다 등극하여 건강악화로 2년3개월만에 39세로

   병사


6. 단종(1441-1457, 재위기간 3년2개월) : 문종의 외아들

   12세에 즉위, 수렴청정할 대상이 없어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으며, 왕은 단지 형식

   적인 결재를 하는데 그침 -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

   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특히 수양과 안평의 세력경쟁)

  * 계유정난(1453년) - 수양은 문종이 죽자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

     어들었고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등의 계책에 따라 안평대군 편인 김종서, 황보인

     등을 안평대군을 추대한다고 죽임- 이 일로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라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하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상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남

  * 상왕복위사건(1456년) -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등 사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 1457년 유배된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이 단종복위 계획하다 발각되어  

    단종은 사사됨 


7. 세조(1417-1468, 재위기간 13년 3개월) : 세종의 둘째

   영특하고 명민하며 학문이 뛰어나고 무예에 능하며 성격이 대담

   왕권강화 정책, 집현전 폐지, 승정원 기능강화. 불교융성

   원상제 -삼중신(신숙주, 한명회,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대리서무제

   즉위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림.  

   * 정희왕후 - 조선최초의 수렴청정(19세의 예종)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켜 섭정함(7년간)

   * 의경세자 - 세조의 맏아들(단종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리다 20세에 요절함)

                월산대군(맏아들), 자을산군(둘째아들) - 성종


8. 예종(1450-1469, 재위기간 1년2개월) : 세조의 둘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서무대리가 이루어져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왕

   원상제도 -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제도. 왕의 업무능력 미숙함을 보조하기 위한 제도


9. 성종(1457-1494, 재위기간 25년 1개월) :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태어난 지 두 달도 못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짐.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射藝와 서화에도 능함

   숭유억불 정책 강화, 유교문화 강화(신숙주, 한명회 등이 주도)

   원상제 폐지하고 왕명출납권과 서무 결재권 되찾음. 도학정치의 기틀마련. 성리학 장려

   태조이후의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 완성하여 백성들은 개국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

   활발한 문화서적 편찬 :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악학궤범

  * 폐비윤씨사건 - 말년에 유흥에 빠져들어 규방을 출입하는 것을 왕비 윤씨가 시기하여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비화해 폐비됨 - 갑자사화의 발단,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도 이 시기의 인물임.

  * 사림파 등장 -정몽주나 길재의 학풍을 잇는 도학적 실천을 구현하는 군자임을 내세움

                 김종직,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남효온, 조위, 조광조 등   

      김종직 -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비판, 세조의 불의에 동조한 신숙주, 정

               인지 등의 공신들 멸시함(훈구세력 자극)

      조의제문 :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것에 세조가 단종을 폐한 것을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 -무오사화의 발단


 10. 연산군(1476-1506, 재위기간 11년 9개월) : 성종의 장남, 폐비윤씨 아들

     성종이 죽자 19세에 즉위하여 초기까지는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 이어짐

    * 무오사화(1498) - 신진사림과 훈구세력 간의 정치투쟁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은 진나라의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으로, 이글에서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 - 이는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 :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을 싫어하던 차에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척세력이 이를 상소함 - 김종직 문하 제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士禍가 아닌 史禍라고 쓴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 조의제문 발견)

    * 갑자사화(1504) -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세력의         힘의 대결. 임사홍이 훈구세력과 잔여 사림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 꾸미려  폐비윤씨 사건 들추어 냄- 이로 인해 7개월에 걸쳐 많은 희생자 발생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


11. 중종(1488-1544, 재위기간 38년 2개월) : 성종의 차남

     박원종일파의 연산군 폐위사건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공신 세력에 밀려 조정의 주

     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자 신진 사림세력이자 급진 개혁론자인 조광조 끌어들임.

    * 기묘사화(1519) -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세력이 지나친 도학 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 쿠데타적 성격이 짙음

    * 서경덕(1489-1546) : 학문의 요체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에 있다.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 뿐.

    * 황진이

 

12. 인종(1515-1545, 재위기간 9개월) : 중종의 장남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 남김

    지극한 효성, 너그러운 성품, 금욕적인 생활 , 도학사상에 매료됨

    생모 장경왕후가 그를 낳고 7일 만에 죽자 문정왕후가 길렀으나,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문정왕후는 그를 죽이려 몇 차례 시도함.


13. 명종(1534-1567, 재위기간 22년) :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아들

    12세에 등극하여 8년간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받음

    왕의 권위가 떨어지고 조정대신들이 권력 독점하며 사리사욕 채우기에 급급하여 사회는

    어수선해지고 민심이 병들어 흉년이 계속되고 도적떼가 난립 -임꺽정

    국방이 허술해진 틈을 타 왜구가 기승을 부림 - 을묘왜변(1555)

    이 같은 조선혼란의 원인은 문정왕후였으며, 그녀가 죽자 윤원형일파가 사라지고 명종     

   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선정을 펴는데 주력

  * 을사사화(1545) -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이 사건 이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

  * 이언적 :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이황의 성리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끼침

  * 이황 : 학문에 본격적으로 정진한 것은 『주자대전』을 읽은 43세 때부터임

    그는 만학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에 이르는 한편 동양 유학의 한 산맥을 이룸


14. 선조(1552-1608, 재위기간 40년7개월):중종의 후궁 창빈안씨의 소생 덕흥군의 세째       

     16세에 등극하여 즉위 초에는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 이듬해 편전을 넘겨줌

     학문에 정진하고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으며, 정계에서 훈구, 척신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함. 이황과 이이를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함.

  * 영창대군 - 선조의 14명의 아들 중 유일한 적출이며 인목왕후 김씨 소생.

     선조가 늦은 나이에 낳은 까닭에 총애를 받았으며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광해군      

    을 폐하고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었으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루지 못함

  * 사림의 분열과 붕당정치의 전개

    동인(심의겸) - 주리철학적 도학을 배경으로 형성된 이황, 조식문하의 영남학파

    서인(김효원) - 주기철학에 근거를 두고 형성된 이이, 성혼문하의 기호학파

    정철이 실각하자 동인은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감행하여 동인이 인조반정이     

   있기까지 30년간 집권 - 동인은 다시 남인(유성룡, 우성전)과 북인(이산해, 이발)으로  대립 - 북인이 정권을 장악, 다시 소북(남이공, 김신국, 유영경, 박이서, 성준구)과 대북 (이산해, 홍여순 등 노장을 비롯 기자현, 이이첨, 허균)으로 대립

   ※ 이렇듯 끝없는  분파를 통해 조선의 붕당정치는 이어짐 - 이 과정에서 각 당파들은 일당독재의 경향을 보이며 처음에는 미숙함을 드러내지만 후에 인조대에 이르러서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 공존하면서 상호 비판하는 체제를 갖추어 붕당정치의 참모습을 실현하기에 이름

  * 임진왜란(1592-1598) -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해 얻은 전쟁 수행 능력을      

     효과적으로 소비하고 신흥 세력들의 힘을 축소시키려는 일거양득의 전략 구사

     통신사로 다녀온 김성일(동인)과 황윤길(서인)의 견해차로 조정이 논박을 벌이다 요행      

     을 바라던 조정이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방비 상태에서 전쟁발발

    임진왜란이 삼국에 끼친 영향

  1) 조선

    경제적 파탄과 관료기구의 부패 극심

    납속책 시행 - 국가재정 마련책의 일환으로 납속한 자에게 특전 부여하여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음

    문화재 소실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소실, 서적, 미술품 약탈, 전주사고를 제외한 사 고소실

    국방분야 관심 고취, 애국심고취, 병제재편, 무기개량, 병술개혁

    훈련도감설치

    숭명사상 고조(명군의 지원받음)

  2) 일본

    국민생활 피폐, 봉건제후의 세력 약화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 장악

    도자기업 발전, 활자기술 발전

  3) 명

    원군 파병으로 국력 소모 - 국가재정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 초래(여진족의 세력 팽창  방치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


15. 광해군(1575-1641, 재위기간 15년 1개월) : 선조의 둘째 아들로 공빈 김씨의 소생

    실리적 외교론을 펼치며 내적으로는 왕권강화를 통해 민생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

   왕권안정 과정에서 그는 왕위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시켜 죽이고, 왕의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왕권을 위협하던 동복형 임해군도 유배시켜 죽임,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킴

 * 광해군이 임해군을 유배시킨 것은 1608년 명나라에서 조선의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서얼 출신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명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그래서 현장 실사를 위해 사신 파견. 그러자 조정에서는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하여 그를 유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

 * 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조 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한 측면이 강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을 완전히 꽃피우지도 못한 채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다.


16. 인조(1595-1649, 재위기간 26년2개월) : 선조의 다섯때 아들이자 인빈 소생인 정원군의 맏아들. 무력정변으로 광해군을 폐출시킨 능양군

  * 인조반정 - 주도 인물은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인 능양군으로 광해군에 의한 동생 능창군의 죽음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철저한 대명사대주의 노선을 고수하는 서인세력과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노선을 고수하던 대북파와의 대결

    반란에 성공한 능양군은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찾아가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는 교서를 내리게 함.

  * 인조는 광해군 세력을 몰아내고 조정과 사회를 안정시켜 자신의 정치사상을 펼치려 했지만 이는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반정 정권이 들어선 지 채 일 년도 못 되어 다시 한번 이괄이 반란사건을 일으키는데, 인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주했을 정도로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내부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떠난 사건은 처음이어서 민간과 조정은 한동안 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정묘호란(1627) - 후금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 병자호란(1636) -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정묘조약에서 설정한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고 한 것을 거부하자 12만 군사를 이끌고 침략함 - 남한산성에 피신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냄

  *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으로 반청 색깔이 더욱 짙어지며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를 불신하게 되어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 소현을 독살하고 둘째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대의 서인과 남인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정쟁으로 비화된 예송의 원인을 제공하게 됨


17. 효종(1619-1659, 재위기간 10년) : 인조의 차남

    청나라 심양에서 8년 동안 볼모생활을 하며 반청사상을 정립하여 집권초기부터 배청 분위기를 확산시키며 송시열의 북벌론에 근거하여 북벌계획을 추진

  * 나선(러시아) 정벌로 북벌작업에 박차

  * 효종은 평생을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으나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하여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 재건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마찰을 빚기도 함.

    결국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18. 현종(1641-1674, 재위기간 15년 3개월) : 효종의 장남

    즉위하자마자 복제 문제로 인한 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에 휩싸임.

   * 예송논쟁 - 현종, 숙종 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 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 장렬왕 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 단순한 왕실의 전례 문제인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문제이다. 또한 왕위 계승 원칙인 종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정권 주도권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학문적 언쟁인 것 같지만 깊이 파고들어 보면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예로써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 실현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 논쟁으로, 조선후기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사건이었다.


19. 숙종(1661-1720, 재위기간 45년 10개월) : 현종의 외아들

   조선시대를 통틀어 당파 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

   조선 중기 이래 계속 되어 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붕당 내부의 파행적 운영이 심화되어 자체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 그러한 자체 파탄을 심화시킨 사건이 현종 이후 숙종 대까지 계속 이어진 예송이었다.

* 경신환국(경신대출척)(1680) - 김석주가 서인 세력인 송시열과 손을 잡고 남인을 몰아냄

* 기사환국(1689) -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

  소의 장옥정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이 원자로 확정하려는 것에 대해 서인 측이 반대 상소를 올림. 이에 격분한 숙종이 송시열을 사사하고 서인의 노론계 정치인들이 대거 유배됨. 이 사건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이 세자에 책봉

* 갑술환국(1694) -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고 중전 장씨를 빈으로 강등. 노론계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함 

* 장길산 - 산적 두목으로 실존하던 인물

* 오가작통법 - 다섯가구를 하나의 통으로 묶는 마을 조직

   백성들의 호구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유민을 방지하는 한편 부역과 조세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함. 당시로는 마을개념이 굳어 있어 유명무실한 시행책이 되고 맘


20. 경종(1688-1724, 재위기간 4년 2개월) : 숙종의 맏아들, 희빈 장씨 소생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는 것을 목격한 비운의 왕 경종의 등극은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예고

   정권을 잡은 노론은 경종의 건강이 악화되고 후사마저 없자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장하여 경종이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 그러나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할 수  없다며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다시 주장. 노론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가 거둬들이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노론, 소론 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됨.


21. 영조(1694-1776, 재위기간 51년 7개월) : 숙종의 둘째 아들, 무수리 출신 화경 숙빈 소생으로 이름은 금이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름. 탕평정책으로 정국안정, 실사구시의 학문 부흥

  * 균역법 시행, 화폐주조, 군사 무기 제작, 국방정책

  * 인쇄술 개량으로 많은 서적 간행하여 민간에 반포시켜 일반 백성이 볼 수 있도록 함

  * 사도세자(1735-1762) - 영조의 둘째아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홍봉한의 딸 혜빈 홍씨와 가례 올림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나 그를 모함하는 노론 등의 세력에 의해 무고당해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임(28세)

  * 실학의 선구자들 - 안정복, 홍대용


22. 정조(1752-1800, 재위기간 24년 3개월) :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의 아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역시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냄.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나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다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신진인물을 대거 등용해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함

  * 규장각 설치 -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혁신정치  펼침.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등의 활자 만들어짐

 * 문물제도 정비작업 완료 -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월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 간행

 * 위항문학 - 평민들 중심으로 한문학 시단에 대거 참여 (풍요속선 발간)

 * 문예부흥기 -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 근본적인 동력이 됨

 * 노비의 신분상승 운동과 노비정책의 변화

 * 실학파 학자들 - 박지원, 정약용, 박제가


23. 순조(1790-1834, 재위기간 34년 4개월) : 정조의 둘째 아들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사회의식이 성장하는 시기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정치의 기강이 문란해져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일대 사회 혼란이 일어났던 시기

 * 신유박해 - 벽파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으며 정적인 시파와 남인들을 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한 사건. 군신간의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취지이며, 천주교를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왕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 를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기 위해 척사 단행 -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이가환 등 유배당함

 *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성립 - 세도는 본래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 중종조에 조광조 등이 표방했던 통치원리. 그것이 정조 초에 이르러 세도의 책임을 부여받은 홍국영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하기 시작한 데서 변질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일컫는 말.

    정조 대는 실학 사상가들에 의해 북학론적인 정책이 건의되고,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  호의적인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이 높아져 갔기 때문에 보수적 정치세력들은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안으로부터의 변화와 도전에 불안해진 보수 정치 세력은  정조의 죽음과 어린 순조의 즉의를 계기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진보 세력인 실학 사상가 및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 숙청과 탄압을 시작하게 된다. 이 때부터 당파에 의한 당쟁의 시대가 종식되고 집권자의 일족만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 정권이 형성된다. 순조, 헌종, 철종에 걸친 60여 년간의 정권을 독점한 안동 김씨 세도정권은 정조로부터 순조를  잘 부탁한다는 유탁을 받은 김조순으로부터 시작된다.

 * 홍경래의 난 - 조선왕조와 세도정권을 부정한 난


24. 헌종(1827-1849, 재위기간 14년 7개월) :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의 아들

   내우외환으로 후기 조선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나던 시기

   삼정의 문란으로 정국 혼란

   기해박해(1838) - 프랑스 신부와 다수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이 위축되면서 풍양조씨의 세력 우세

   

25. 철종(1831-1863, 재위기간 14년 6개월) :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원군의 손자

 *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뻘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관계로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세움

 *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던 시기

 * 세도정권의 막강한 힘과 독단 앞에 선 철종은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불우한  왕.

빈민구제책이나 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하지만,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에 대한 철종의 자신의 자격지심과 순조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막강한 세도정권의  바람을 막아내고 삼정의 문란을 혁파할 개혁의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임술민란 등 전국적인 위기 상황을 맞게 됨.

 * 동학의 탄생 - 민생은 뒷전에 있고 몇몇 세도가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왕조에 실망한  백성들에게 인간평등과 존중의 길을 제시한 동학이 나타나자 영호남지방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


26. 고종(1852-1919, 재위기간 43년 7개월) :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일본과 서구 열강이 조선을 압박해 오던 시기

   * 흥선대원군 - 고종이 즉위하자 10년간 섭정을 하며 개혁정치 추진

     사원철폐, 탐관오리 처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분쇄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몇 가지 무리한 정책과 세계정세를 읽어내지 못한 채 지나친 쇄국정책을 폄으로써 어려움에 처함

 * 병인양요(1866-1872) -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6년 동안 8천여명의 신자들을 학살.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가 그 보복으로 군함 7척에 총 병력 1천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 점령.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프랑스군 격퇴

 * 신미양요(1872) - 대동강을 건너 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 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을 발단으로 5년 후에 셔먼 호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함과 동시에 통상관계 수립 위해 조선원정 강행하여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밀려 점거 한 달 만에 물러감

 * 임오군란(1882) - 개화파와 수구파의 알력이 점차 심해지던 와중에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됐던 군인들이 난을 일으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흥선대원군이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됨.

 * 갑신정변(1884) - 궁중을 습격한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했다가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됨.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다툼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입음.

 * 동학혁명(1894) - 위 두 사건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발생하다 급기야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

 * 청일전쟁(1894) - 동학혁명 진압을 위해 고종은 청에 원병을 요청,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 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 동원.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하였으나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고 내정간섭하다 일본이 청군을 공격하여 구미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고 승리함.

 * 을미사변(1895) -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국의 힘에 굴복해 청에 돌려주게 됨. 조선은 이 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대러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함

 * 아관파천(1896) -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영사관으로 몸을 옮김.

   여기서 친러정권 수립하고 친일내각의 요인들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 단발령 철폐, 의병해산 조칙 내림.

 * 대한제국(1897) - 아관으로 옮긴 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함

 * 을사보호조약(1905) - 1904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했으며, 이듬해 1905년에 체결하고 맘

   고종은 일본의 강제적인 보호조약에 대한 무효를 선언했지만 미국의 호응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파견하였으나  계획은수포로 돌아가고 고종은 이 해 퇴위하게 됨


27. 순종(1874-1926, 재위기간 3년 1개월) : 고종의 장남

    대한제국의 2대 황제,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고침,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김.

   만 3년간의 재위기간은 일본에 의한 한반도 무력 강점 공략이 가속화되고 마침내 송병준,이완용 등 친일파 정객과 일본 정부의 야합에 의해 주권을 상실하게 되어 1910 년 8월29일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 멸망시킴. 이리하여 27왕조 519년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됨.


※ 재위기간이 30년 이상인 왕

   세종(31년), 순조(34년), 중종(38년), 선조(40년), 고종(43년), 숙종(45년), 영조(51년)

※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 :인종(9개월), 예종(1년2개월), 정종(2년2개월), 문종(2년3개월)

※ 장남으로 자연 승계한 왕 :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