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인간의 본성은 야수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마치 늑대라는 야수들끼리의 관계에 비유한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는 상호 투쟁에 의한 자멸을 피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계약을 맺게 되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국가이다. 그런데 계약에 의해 엄청난 권력을 이양받은 국가는 리바이어선이라는 거대한 괴물로 상징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절대왕정을 이론화한 정치사상서로 잘 알려져 있지만, 자연의 상태를 벗어나는 인류가 문명화 과정에서 겪는 역설을 은유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은 문명화 과정에서 순화되지만, 문명의 산물은 인간의 야성을 모두 흡수하여 거대한 야수나 괴물이 되는지도 모른다.
* 인류라는 종의 종말은 지나친 문명화와 함께 사멸하는 것이 되리라 고 경고한 에머슨의 말에는 인류는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 문명이라는 괴물을 만든다는 은유가 깔려 있는 것이다.
* 허무는 의미감의 상실에서 온다. 반면 환상은 마음 속의 무엇이든 의미감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활성화시킨다 - 캐스린 흄
안 보인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세계는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판타스틱한 다른 세계는 판타지의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은 다양성을 추구하면서도 획일화가 주는 편안함의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인간의 이 분열증적 이중성은 거의 고질같은 것이다. 다름과 다양성은 추구해야 할 가치이지만 불안하고 불확실하며 획일화는 위험하고 인간성을 해칠 수 있지만 일단은 편안하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환상에 대한 의혹의 눈길도 이와 비슷한 마음의 자세 때문에 나온다.
완전한 카오스는 이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에 있을 수 있었고, 완전한 코스모스는 모든 생동력을 빼앗아 이 세상의 종말을 뜻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 삶은 본질적으로 카오스모스(카오스+코스모스)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그 노력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름과 다양성을 포용하는 노력이라는 것을. 그 노력을 위해서는 현실 감각과 함께 환상적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 인간이 이루어낸 문명은 언제나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야누스적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21세기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첨단 과학 문명의 산물들이 지닌 양면성은 가공할 만하다. 그것은 원자탄과 같이 과학문명의 성과물이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도 그것들이 일상적으로 대중의 소유와 활동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자동차, 컴퓨터, 휴대전화 등은 이미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침투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명 이기들은 여러 사람에게 이로운 만큼 해로울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비례하여 커진다. 다만 바쁘고 습관화된 삶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문명이기의 이로울 이자의 함정 �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어떠한 이기도 해기일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가끔 되뇌어볼 필요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도구를 비롯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완벽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만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인간이라는 자기 한계를 지닌 창조자에게는 피조물의 변덕(?)조차도 큰 위험 부담이다. 인간의 피조물은 언제, 어디서 그 창조자인 인간을 골탕먹일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피조물을 마음대로 어쩌지도 못하는 불완전한 창조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상에서 피조물들을 상당 부분 제어하기 때문에 그들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경계는 필요하지만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앙가주망이라는 말에는 어떤 일에 자기 자신을 담보하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일종의 '자기구속'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자기구속인 이상, 구속일지라도 행위자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 자기 외부에서 지시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어떤 임무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에게 앙가주망은 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세상사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앙가주망 정신을 정리한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은 고독한 존재이다. 아무도 그에게 어떤 역할을 맡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아무도 그에게 역할을 맡기지 않았지만, 개인의 자유에 기반해 현실 세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기 자신을 담보하는 투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의 진행'이라는 역설에 부딪히는 삶을 산다. 진화하고 부패할 수 있는 모든 유기체는 시간과 버겁게 비기며 살고 스러져 간다. 시간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맞는 만큼, 우리가 성장 또는 쇠퇴의 진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더 현실적인 말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흐른다.
헤겔이 살아있다면 철학자의 미래 예측을 비웃을 것이다. 해질 녘에야 나는 부엉이가 무엇을 하겠냐고. 하지만 헤겔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이 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땅거미 질 무렵에야 자신의 비행을 시작하지만, 새로운 하루를 여는 새벽빛을 보며 둥지로 돌아온다. 여명에 귀소하는 부엉이! 헤겔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부엉이가 '과거의 끝'을 본다는 것만 생각했지, '미래의 시작'을 본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부엉이는 귀소하면서 본 새벽빛을 미래로 투영하는 꿈의 화두로 삼는다. 철학자의 미래 예측은 미래학자의 연구에 비하면 공상의 수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자의 미래 구상은 현실의 새벽빛을 보고 그것에 상상력을 부여하므로 때론 더욱 현실감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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