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며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습득하는 편식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편식은 결과적으로 균형의 파괴와 소멸을 낳는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되어야 하듯, 낯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열어둘 수 있어야 한다. 즉, 인문학도가 과학책을 읽고 경제인이 시를 읽고 정치가가 음악을 이해할 때 비로소 사회는 균형을 찾는 것이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과 교양은 힘을 기르는 도구적 기술이 아니다. 그보단 권력의 힘에 위축되고 좌절할 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나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 이것이 앎의 진정한 소명이 아닐까?
죽음이란 인생의 의미를 박탈하는 것이라기보다 인생으로 하여금 수없이 다양한 생의 의미를 창조토록 하는 것이다.
생의 의미가 어떤 방향과 뜻의 표현으로 이해되는 것은 죽음이 언제나 눈 앞에 있고, 이에 따라 실천 속에서 자기 창조의 노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표현하면서 2차적 의미, 함의, 해석의 여지 등을 완전히 거부하고 그 표현을 완전히 통제하려 한다면 언어는 순전한 의사 소통의 도구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다른 해석도 불가능한 엄격한 표현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의식을 갖고 있고 언어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집단적 공유물이므로 언어 사용에는 언제나 불분명한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언어의 애매성이 완전히 부정적인 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가는 것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을 통해 새로운 이해와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 작업이 가능하다.
여기서 보편 언어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을 사용할 경우 사고의 빈곤이 빚어질 것이며 동시에 하나의 사상만을 갖게 될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예술은 보이게 하는 것이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다". 자주 인용되는 클레의 이 표현은 우리와 현실의 관계를 바꿀 수 있는 예술의 힘을 말하기도 한다.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유일한 가능 현실로 간주한 세계를 넓히는 것이고, 우리 세계관의 변환점을 가져올, 필연적으로 감각적인 경험들을 제안하는 것이다.
일시적인 것은 우리가 자기자신을, 자신의 쾌락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탐색하도록 해준다. 이처럼 일시적인 것은 그 즉시 사용되며 그 가치는 결코 교환가치가 될 수 없어 모든 상업적 유통을 상징적으로 중단시킨다.
그런데 사실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 자체가 끊임없이 하루살이 같은 일시적 운명을 보여주지 않는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대부분은 재빨리 사라지게 마련이며, 한 개인의 실존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일련의 사건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사건들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일상적 삶은 무가치한 세상이 된다.
반대로 일시적인 것이 우리의 주위를 끌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현재의 매순간에 새로운 중요성이 부여될 수 있어 우리의 평범한 삶은 두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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